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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⑦

    두 유 노 강남스타일?
    – 강남 개발 (1)

    • 글. 최성원(서울지역본부 차장)
  • 2012년, 가수 싸이가 B급 정서로 내놓은 노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차트 2위에 올랐던 일을 기억하는가.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 ‘강남’이 전 세계 인구에게 회자되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근현대 서울의 도시계획과 ‘강남스타일’은 어떤 관계일까?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과 토지구획정리사업

광복 및 한국전쟁 전후 면적 268㎢에 불과했던 서울시는 1963년을 기점으로 두 배 이상의 면적인 605㎢로 커지게 된다. 한국전쟁과 같은 전쟁 재발 시 강북 인구가 남하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시흥군 지역이었던 서초구 일대와 광주권 일대였던 강남구가 1963년부터 공식적으로 서울로 편입되었다.

20세기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도. 한강 이남과 서부 및 동북부는 1963년에야 추가되었다.

1964년, 서독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직접 구상하는데, 고속도로의 서울 강북 도심 연결을 위해 신규 교량 설치가 불가피했다. 이로 인해 건설된 교량이 지금의 한남대교인 제3한강교이다. 한남대교 덕분에 접근성이 개선되자 강남 일대 땅값의 폭등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60년대 당시 국가의 재정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예정지 일대 토지에 대한 토지구획 정리사업을 실시하여 건설비를 충당하였다. 1967년 말부터 착공한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도에 준공되어 서울-부산 간 총 428km가 개통된다.
여담으로 당초 한남대교는 왕복 4차선이었지만, 북한의 평양 내 대동강 횡단 교량보다 폭원이 넓어야 한다는 이유로 왕복 6차선으로 조성되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에도 부족해 지금의 한남대교는 왕복 12차선으로 운영 중이다.

강남 개발 촉진책과 강북 억제책

강남 개발을 촉진하려면 강북의 개발이 억제되어야 했기에 1970년대 초부터 강북 지역 내 유흥시설, 백화점, 도매시장 등의 인구밀집 시설의 신설이 금지되었다. 유명 사립학교 및 주요 정부기관의 이전도 동시에 추진되었다. 일례로, 최초 영동2지구 개발 계획에 따르면 현재 코엑스가 입지한 삼성동 일대는 상공부 및 산하기관이 입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훗날 과천종합정부청사 개발에 따라 상공부의 이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또 다른 예로 지금의 신사동 일대에는 수많은 유흥시설이 입지해 있는데, 1970년대 초 강북 억제책 이후 강남 개발 촉진책으로써 각종 세금이 면제되자 강북 도심과 가장 가까운 한남대교의 남단에 집단적으로 유흥시설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영동 1지구(서초구 일대)와 영동 2지구(강남구 일대)

현재의 이른바 강남지역 일대는 영등포의 동쪽이란 의미로 ‘영동지구’로 명명되었는데, 현재의 서초구 일대인 영동 지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목적 달성을 위해 대규모로 시행되었다. 강남구 일대인 당시 영동 2지구의 경우 강북의 개발 억제 및 인구 분산을 목표로 강북 내 정부청사의 이동과 연계하여 조성을 하게 되나 그 이면엔 당시 청와대가 주도한 토지 투기 목적의 개발 사업이 있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강남 1970>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영동 2지구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 비자금 마련을 위해 청와대 경호실 지시 하에 서울시 공무원이 토지 매입 및 매각을 반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영동 1, 2지구의 토지구획정리사업 위치도
강남 개발 계획의 특징

첫째, 규모의 광활성이다. 강남 개발에 적용된 도시계획 수법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은 그간 유럽 일부 국가와 일본 등지에서 적용되어왔다. 우리나라 강남의 개발 면적(총 837만 평, 영동 1지구 472만 평, 영동 2지구 365만 평)은 세계 도시계획 역사를 통틀어 가장 넓은 토지구획정리사업이다. 백지와도 같은 농지에 마음껏 도시 개발이 가능한 면적이었다.
둘째, 과감한 도로 계획이 적용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남 개발에 앞서 주요 관료들에게 일본과 미국 주요 도시 견학을 다녀오라며 보다 미래지향적인 도시를 만들 것을 주문하였는데, 그 덕분인지 강남 내 주간선도로는 폭원 50m 내외의 광로로 조성되었다. 이는 당시 교통량 수준을 감안하면 과도한 수준이었으나 강북 구도심의 구불구불하고 정리되지 못한 도로에 비해 거주자들의 자동차 이용 편의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셋째, 최소 대지면적이 확대 적용되었다. 당시 건축법상 최소 대지면적은 90㎡(27평)였지만, 강남 개발 당시엔 165㎡(50평)으로 제한됐다. 그 결과 강남은 기본적으로 빈곤층 내지 저소득층의 진입이 어려운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넷째, 국내 도시계획 역사상 ‘아파트 지구’가 최초 적용되어 그간 산발적으로 조성되었던 아파트 단지가 집단적으로 조성되었다. 이 주거 상품이 속된말로 ‘돈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향후 대한민국 국민이 선호하는 주거 양식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었다. ‘왜 사람들이 강남에 사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의문과 연계하여 다음 연재에서 보다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그래서, 강남스타일은 무엇으로 정의되어야 할까? 서초구 반포동 어느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가수 싸이가 그러했듯 기존 강북 도심 대비 우수한 도시환경에서 멋진 외제차를 타고 광로를 달리며 대한민국 상위 1%의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것, 어쩌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쯤 동경하는 삶의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현장에 설치되었던 영동 신시가지 조감도
강남대로 주변의 개발 전후 비교 사진
참고문헌
• 서울도시계획이야기 3권, 손정목 (2003)
• 이미지 출처 : 서울시 및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