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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H인을 위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④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
    금융 1번지로 탈바꿈하기까지 - 여의도

    • 글. 최성원(글로벌사업처 차장)
  • 국내 개발사업이 언론에 언급될 때 ‘여의도 몇 배’ 크기라는 표현을 종종 들을 수 있다. 1960년대 후반 당시 여의도 개발이 규모 면(당시 80만 평)에서 그만큼 인상적이고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제방 내부로만 약 90만 평(3㎢) 면적인 여의도에 대해서 알아보자.
여의도 서측 끝단의 국회의사당과 주변 스카이라인
개발되기 이전의 여의도

한강 상류 소양강댐 및 충주댐 건설 이전의 여의도는 우기엔 물에 잠겼다가 건기에만 나타나는 한강 하류 두 개의 섬 중 하나였다. 1916년 일제는 여의도에 국내 최초의 비행장을 건설했는데, 광복 이후 한국 공군의 발상지 K-16(공군기지)이 1971년 현재 성남에 위치한 서울공항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이곳에 군부대가 있었고, 김포공항이 1961년부터 국내·국제선을 취항하기 전까지 항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공항 역할을 했다.

여의도 제방축조 직후의 항공사진. 개발 이전 활주로가 아직 있다.
김현옥 서울시장과 여의도 개발

1960년대 후반 김현옥 시장은 한강변 개발 및 택지개발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강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여의도 또한 제방을 쌓고 택지를 충분히 확보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당시 건설부는 한강변에 커다란 섬을 만들어 한강 본류의 흐름을 막으면 안 된다는 논리로써 반대했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 시장은 박 대통령에 직보 및 재가를 받는다. 하지만 한강 자체는 하천으로서 국유지였으므로, 강 흐름 개선을 위한 샛강(현재 여의도와 올림픽대로 사이 물길)을 감안한 제방축조를 요구한 건설부의 조건을 감안해 사업승인 후 착공하게 된다. 이 여의도 건설은 박 대통령의 관심 사업이었으므로 김현옥 시장은 제방 건설을 위한 이른바 ‘100일 작전’을 수립, 1967년 12월 착공해 반년도 안 된 1968년 6월 1일에 박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가진다.

김수근의 이상적 입체계획 vs. 박병주의 현실적 계획

세운상가 설계를 계기로 당시 김 시장 및 군부정권과 가까이 지내던 젊은 건축가 김수근이 최초 여의도 계획을 수립한다. 그는 세운상가에서도 시도했던 입체화의 개념 – 상업 업무 지역 내 지상은 자동차 도로, 보행은 7m 높이 데크로 이동 - 을 여의도에도 적용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현하는 데만 20년, 그리고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1천억 원이 소요되기에 불가능에 가까운 계획이었다.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을 계기로 사임한 김현옥 시장의 후임인 양택식 시장은 1970년 여의도 제방 건설사업을 포함한 각종 토건사업으로 인해 열악한 서울의 재정난을 타개할 목적으로 주공 출신의 홍익대 박병주 교수에 의뢰하여,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던 김수근의 입체계획을 전면 평면화시키고, 고급 아파트 건설이 가능한 택지 매각 계획을 수립한다. 특히 여의도 시범 아파트의 경우 학군제의 개념을 도입해 여의초등학교 졸업생은 무조건 여의중·고를 진학했는데, 점차 고소득 고학력자들의 입소문을 타 프리미엄이 높아지니 자연스럽게 대단지가 형성되었고 비교적 빠른 시일 내 도시가 개발됐다.

김수근에 의한 여의도 입체계획 모형
비상용 활주로 역할, 여의도 광장

어느 날 청와대의 호출로 양택식 시장이 박 대통령을 면담하니 길이 1.3㎞, 너비 약 300m의 넓은 광장을 붉은 선으로 직접 그려 이를 516광장으로 명하라 지시를 내렸다. 당시 국제 정세상 동남아의 도미노 현상, 국내에선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인해 청와대는 그 어느 때보다 안보 문제에 대해 예민했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뒷배경을 몰랐던 도시건축 전문가들로부터 광활한 광장이 여의도를 공간적으로 분절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여의도 광장 이외에도 전시를 대비한 도심 내 대피소, 경부고속도로 내 비상용 활주로 설치 등도 직접 박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질 만큼 도시계획 전반에 박 대통령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 여의도 광장은 이후 민선 시장인 조순 시장 시절 1997년도에 100억 원의 비용을 들여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거듭나게 된다.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 당시 여의도 광장
친환경 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한 여의도 공원
여의도가 동고서저인 이유

여의도 개발 초기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은 당연히 국회의사당이었다. 당초 5층으로 설계됐지만, 광화문 앞 구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보다 한 층을 더 높이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6층으로 설계됐다. 국회의사당의 입지 후, 국회사무처는 여의도 서쪽 일대의 건축물 입지와 관련하여 여의도 광장과 국회의사당 사이는 국회의사당 건물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서울시는 이를 지침화 하여 광장 서측 일대를 ‘최고고도지구’로 지정, 지상 40m를 한계로 설정하게 됐다.

서울 3핵도시 이론과 금융 중심지

여의도는 1970년대 중반 구자춘 시장의 3핵도시 주장에 힘입어 각종 금융업계가 입지하게 된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국내 최고층 마천루의 타이틀을 지녔던 63빌딩(지상 60층, 지하 3층) 이후, 2012년에는 이보다 높은 국제금융센터(IFC)가 세워지는 등 서울의 명실상부한 금융 중심지로서 인식된다. 혹자는 이 여의도는 강남, 목동 등지의 서울 시내 신시가지 조성에 앞서 격자형 도로망에 의해 필지별 용도가 엄격히 구분되고 단독주택가 없이 고층빌딩과 아파트로만 채워졌던 점에서, 한국 근현대 도시계획사에 최초로 폐쇄적 지역사회의 탄생을 알린 ‘도시개발의 시범이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로도 언급한다. 그만큼 여의도는 나름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지닌 지역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듯하다.

참고문헌
• 서울도시계획이야기 1권, 손정목(2003)
• 여의도, 도시개발의 시범이자 반면교사(http://www.redian.org/archive/135561)
• 이미지 출처 : 서울시 및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