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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남경 터가
조선의 수도 한성으로 택지 되다- 글. 서경원 사진 협조. 도서출판 담디
- 대한민국 서울은 정도 63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오래된 도시다. 조선 초창기 한성의 궁성과 도읍의 건립 배경에 관한 역사를 살펴보려 한다. 터를 정하고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아 한 도시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는 방대한 한 권의 건설 기록지를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땅 위에 터를 닦고 집을 짓는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다. 수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앞선 경험을 두루 살펴서 반면교사로 삼는 일은 그래서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한 나라의 도읍지로서 줄곧 좋은 평가를 받았던 땅, 한양
고려의 무신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했다. 형식적으로는 고려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양위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왕권 찬탈에 가깝다. 역성혁명을 일으킨 대다수의 창업 군주는 새로운 도읍으로 천도(遷都)하는 게 상례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도읍을 옮기려는 의지가 강했다. 반면에 삶의 터전을 송도에 둔 권문세족들은 천도를 심하게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새로운 도읍을 세우는 일은 어렵다. 그 지극히 어려운 천도 과정이 바로 새 나라 세우기의 역사이기도 했다.
지금 서울은 고려 시대에는 한양부로 불렸다. 고려 문종 21년(1067)에 남경유수관으로 승격되고, 다음 해에 남경에 새로운 궁이 세워졌다. 15대 숙종 때는 <남경천도론>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천도 기획안이 만들어진 시기였다. 왕은 친히 지금의 한양인 양주에 행차하여 천도 자리를 살폈다. 숙종 9년(1104)에는 삼각산 남쪽 양지바른 터에 궁궐을 짓고 남경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한양은 개성, 평양과 더불어 고려의 세 수도로서 거점 도시가 되었다. 국토균형발전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었다. 고려의 왕들은 정치경제가 혼란하고 어려울 때마다 도읍을 옮기려 시도했다. 신하와 술사들은 송도의 지기가 약해졌으므로 이궁(離宮, 별궁)을 건설하거나 천도할 것을 건의했다. 그때마다 후보지로 남경인 한양이 줄기차게 거론되곤 했다. 고려말 우왕과 공양왕 때에는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다음해 송도로 다시 환도(還都)하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도 한양은 줄곧 한 나라의 도읍지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땅이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선정된 데는 이러한 배경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천도 의지가 강했던 임금 vs. 개경에 머물고 싶었던 신하들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개성의 수창궁에서 조선의 왕으로 즉위했다. 등극하자마자 도평의사사에게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도록 명했다. 곧바로 신하들은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천도를 반대하고 나섰다. 천도 의지가 분명했던 태조로서는 좀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단 한양 천도를 보류하고 새로운 후보지들을 물색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1393년 1월 권중화가 지금의 계룡산 일대를 새 도읍지로 추천했다. 며칠 후에 태조는 왕사인 자초를 데리고 계룡산으로 향했다. 이십여 일 만에 현장에 도착해서 땅의 측량을 지켜보았다. 친히 언덕에 올라가 두루 지형과 지세를 살펴보기도 했다. 당연히 같이 간 무학대사에게 여기가 도읍지로서 적당한지도 물었다. 대사는 “능히 알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도 계룡산은 도읍지로 결정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다 그해 12월 돌연 공사가 중지되었다. 하륜이 한 나라의 도읍은 마땅히 국토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어 도읍지로 적당하지 않다고 상소했다. 특히 계룡산은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방향이 나빠 국운에 매우 흉하다는 풍수지리상 논거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하륜은 대안으로 한양의 무악을 천거했다. 지금의 신촌 일대 땅이다. 태조는 권중화, 조준 등을 보내 무악을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 무악 남쪽은 터가 좁아서 도읍지로 적당하지 않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임금은 <음양산정도감>을 설치하여 여러 신하에게 천도할 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찾아보라고 명했다. 전국 10여 군데 도읍 후보지를 두고 임금과 신하들 간의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마음 급한 임금은 다그치고, 천도에 시큰둥한 신하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반대를 하는 모양새였다.
1394년 8월 8일 임금은 몸소 무악을 살피러 한양으로 행차했다. 신하들은 여전히 천도를 반대하며 그대로 개경에 머물자는 의견을 개진했다. 13일 임금은 신하들과의 기 싸움으로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며 고려의 남경을 둘러보았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쯤으로 추정되는 남경의 옛 궁 자리와 주변 산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신하들은 도읍으로 개경이 첫째지만, 꼭 도읍을 옮기려면 여기 남경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같이 간 왕사에게 물으니 “남경은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신하들의 의견을 물어 결정하소서.”라고 말했다 한다. 이것이 정사에 나오는 무학대사에 관한 한양 천도 내용의 전부다. 나머지 이야기는 개인 문집에 나오거나, 주로 호사가들의 야사이다. 8월 24일 도평의사사에서 남경이 산수가 수려하고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하니, 도읍으로 정함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마땅하다는 안이 올라왔다. 왕은 올라온 안대로 실행하라는 답을 내렸다. 이로써 개국 후 2년여의 우여곡절 끝에 한양이 조선의 새로운 도읍지로 최종 결정되었다.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이 설치되고, 이후로 한성의 조성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양은 한반도의 수도로서 갖춰야 할 3가지 조건을 두루 갖췄다. 우선 위치상 반도의 중앙에 위치하므로 전국을 통치하기에 적합하다. 주변에 큰 강들이 많아 수륙 간 원활한 물류의 운송과 교통조건을 잘 갖췄다. 산과 강이 잘 어우러져 경관 또한 수려하다.
좌청룡 우백호는 하늘의 별자리
1394년 10월 28일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했다. 옛 남경의 객사에 머물면서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과 시장을 짓는 한성건설을 총지휘했다. 먼저 한 일은 산천의 신에게 궁성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는 고유제를 지내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토지와 산신들에게 먼저 제사를 지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성의 진산인 삼각산을 나라를 지키는 신령으로 여겨 ‘호국백’이라고 신격화했다. 백악은 ‘진국백’, 남산은 ‘목멱대왕’으로 삼아 신성시했다. 일반 사대부들이나 백성들은 이 산들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금했다. 한양 주변의 사방에 있는 산들을 나라를 지켜주는 사신으로 삼았다. 산꼭대기에는 위패를 모시며 관리했다. 우리 조상들의 고유한 산악숭배 사상이다.
한국인치고 좌청룡 우백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말속에는 사방의 방위와 고유한 색깔과 상상의 동물을 지칭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혹시 미신 아닌가 하고 여기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늘의 별자리에서 온 것이다. 국보 제228호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근거다. 1만 원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바로 그 별자리들이다. 한성 조성의 근본이 되는 개념이다. 천인합일 사상이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되니 관심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