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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인을 위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⑤
프라자 호텔이 서울시청 앞 광장을 막아선 이유
- 도심부 재개발 사업- 글. 최성원(서울지역본부 차장)
- 한국전쟁을 전후로 서울 시내 건축행위는 거의 없었다. 해방 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건설자재의 수급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한국전쟁 결과 황폐해진 서울을 비롯 전 국토에 새로 지어진 건물은 경제 여건상 최소 비용으로 겉만 그럴싸한 건물만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루했던 서울의 도심은 지속적인 도시재개발을 통해 21세기 현재 첨단의 이미지를 갖춰가게 된다.
우리나라는 1962년 도시계획법 제정, 1965년 도시계획법시행령 중 재개발지구 지정에 관한 내용이 신설되었는데, 마침 같은 해 한일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재개발과 관련한 엄청난 정보가 일본으로부터 유입되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정된 재개발지구는 ‘세운상가’였다.
서울 도심 재개발을 촉진한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
한국전쟁 후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존슨 대통령이 1966년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당시 서울 인구 350만 명 중 200만 명이 동원되어 환영식을 열 정도로 존슨 대통령의 방한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환영인파 뒤로 보이는 서울 도심이었던 소공동의 열악한 모습이 TV를 통해 전 세계에 적나라하게 송출되었다.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제법 잘사는 나라라고 여겨졌던 한국의 실상이 알려지자 이를 부끄럽게 여긴 미국의 교민회는 청와대에 ‘서울시청 주변 슬럼지역을 정비해 달라’는 민원서를 제출하고, 이것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됨으로써 서울의 도심재개발이 촉진되는 계기가 된다.
- 1966년 존슨 대통령 방한 시 서울시청 앞 환영 행사
화교 밀집지 소공동이 한화타운으로 거듭나기까지
화교 집단은 1882년부터 서울에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1970년 당시 외국인 약 1만 명 중 8천 명 이상이 중국인으로, 소공동이 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화교들은 그들의 거주지가 점차 슬럼화 됨에 따라 재개발을 희망하였고, 서울시는 화교회관 건설 등을 포함한 소공동 재개발계획을 세웠지만, 지주 및 건물주 간 합의 지연으로 사업추진이 지지부진하였다. 한편 현재 한화그룹의 전신인 ‘한국화약’ 측은 야금야금 소공동 일대 땅을 매집하고 있었는데, 한국화약 측이 화교 소유 토지에 대해 감정가 평당 30만 원짜리를 평당100만 원 이상의 값으로 매입하겠다 하니 화교들은 모두 보상금을 받고 그들이 반세기 이상 터를 잡고 지냈던 곳을 떠나게 된다. 이로 인해 세워진 건물이 시청 앞 서울광장 남측의 서울 프라자 호텔이며, 그 바로 뒤로는 한화생명 및 한화빌딩이 들어서게 된다. 혹자는 숭례문과 서울시청을 잇는 통경축을 서울 프라자 호텔 등의 고층건물이 막아 버렸음을 비판하는데, 사실은 당시 박 대통령이 한화 측을 통해 비밀스럽게, 그리고 서서히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부에서 화교들을 축출한 것으로 알려진다.
- 프라자 호텔과 한화빌딩 건축 전(위)과 후(아래) 서울시청 광장 및 소공동 모습
서울 도심 재개발 촉진의 배경과 그 대책
1972년 남북간 7·4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이와 함께 서울도심 재개발이 본격 추진되었다. 1972년 관련법 제정 이후 ‘재개발촉진지구’로 지정이 되면 조세면제, 기납부 세금환급, 자금 융자 등의 혜택이 주어졌는데, 서울시의 재개발 정책이 기존 소유자 및 세입자는 쫓겨나고 대기업 소유의 고층건물이 들어선다는 점 때문에 재개발지구 원주민의 저항이 극심할 수 밖에 없었다.
보험회사의 안전한 투자처로 활용된 재개발사업
앞서 언급하였듯 재개발사업 추진 시 제공되는 각종 세제혜택을 적극 활용하려는 보험회사들이 재개발사업에 뛰어든다.
그들 입장에서는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고객의 돈으로 부동산 투자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 1호는 현재 삼성생명의 전신인 동방생명으로, 오피스 건설 후 삼성계열의 회사를 입주시키면 그만이므로 사업성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동방생명의 성공 이후 타 보험회사로 파급이 되는데 크고 높은 건물을 과시함으로써 보험사 자체의 경제력과 신용도를 광고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례로 현재 세종대로와 종로가 만나는 곳에 대한교육보험이 건설한 교보빌딩이 있다.
- 숭례문 옆 동방생명(현재 삼성생명) 빌딩(1987년)
- 광화문지구재개발 계획(1978년)
가장 어려운 재개발사업 현장은 주공과 토공의 힘으로
서울 도심 내 재개발 현장 중 이권관계가 가장 복잡했던 을지로 2가의 경우, 1977년에 서울시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 후 3~4년이 지나도 이곳을 선뜻 개발하겠다는 민간이 나타나지 않았다. 1980년대 초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 확정 이후 시간이 부족한 정부 입장에서는 낙후한 해당지역의 재개발을 반드시 이뤄내야만 했기에, 중앙정부의 지시로 1984년 주택공사가 이곳의 재개발사업 시행자가 된다. 예상대로 소유자 및 세입자의 극렬한 시위가 있었지만 적법 영업자에 대한 신규 건물 특별분양권, 무단점유 거주자에 대한 고덕주공아파트 입주권 부여 등의 해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총 3개 동 중 1동은 쁘렝땅 백화점, 2동은 한화그룹 본사, 3동은 중소기업은행 본점이 입주했다.
- 을지로2가 재개발지구 조감도
서울역광장 정면의 언덕이 양동지역으로, 현재 CJ본사 등이 위치한 이 지역 또한 난이도가 높은 사업지구였다. 양동재개발의 경우 1985년도 IMF 및 IBRD 연차총회가 유치되어 외빈들의 힐튼호텔 투숙이 결정되자 조속한 사업추진이 필요했다. 이 또한 사업의 난이도를 고려, 토지개발공사를 1983년도에 사업시행자로 지정하게 된다. 철거 민원과 보상 민원을 가까스로 해결한 토지공사의 노력에 힘입어 해당 부지는 IMF 및 IBRD 행사 개최 3개월 이전 가까스로 보상·이주·철거가 완료될 수 있었다. 이처럼 도시재개발의 가장 난제는 LH의 전신인 주공과 토공이 해결해 주었다.
- 양동재개발지구
- 참고문헌
- • 서울도시계획이야기 2권, 손정목(2003)
- • 서울신문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0)도심재개발((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0830021002))
- • 이미지 출처 : 서울시 및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