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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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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의
혼이 담긴 신전, 종묘- 글. 서경원 사진 협조. 도서출판 담디
-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건축물들이 있다. 경복궁과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한양도성이다. 특히 종묘는 왕조의 정통성과 권력의 당위성을 가시적으로 구현한 건축물이다. 유교가 국시인 조선에서 최고로 신성시되는 상징적인 장소다.
궁궐을 짓기 전에 먼저 조상을 위한 종묘를 지었다. 궁궐을 완공하고도 종묘의 조상신에게 미리 고유제를 지낸 다음에야 입궐했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 왕이 급박히 피난 갈 때도 종묘의 신줏단지는 꼭 챙겨 모시고 갔다.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의 혼이 담긴 신전이다. 그래서 종묘사직은 바로 나라를 대신하는 의미로 쓰였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극을 볼 때마다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라는 대사를 자주 듣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종묘는 제례악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유무형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종묘와 사직단 세워 조선의 기틀 잡다
동양의 역대 왕조들은 도성을 건설할 때,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라는 책을 모범으로 삼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도 이 책을 참고하여 한양을 설계하고 시공했다.
<주례>는 지금으로부터 2천 5백여 년 전에 주나라 주공이 정리한 법전이다. 주공은 예악과 법도를 정비하고 고대 봉건제도를 정립한 인물이다. 그는 후세 정치가들이나 유학자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유학의 시조로 추앙받는 공자는 꿈속에서나마 주공을 뵙고 싶어 했다. 고려말 충신으로 알려진 정몽주(鄭夢周)도 주공을 꿈속에서라도 만나 닮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이름이다.
<주례>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모든 행정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책으로 후대 왕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 책은 관제를 여섯 부서로 나누었다. 각각의 부서 이름은 천관, 지관, 춘관, 하관, 추관, 동관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춘하추동 사계절을 따서 책 제목을 지었다. 이는 상하는 물론 사방 온 세계를 아우른다는 의미다. 천지 만물의 운행원리를 본받아 나라를 운영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늘과 사람이 같다는 동양의 천인합일 사상이 배경이다.
이 체계를 바탕으로 조선 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의 6조(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도 만들어졌다. 6권 4책으로 구성된 경국대전은 사계절의 의미인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분류되어 있다. 계절이 오고 가는 자연의 섭리를 본받아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겠다는 통치이념의 표방이다.
<주례> 6권의 책 중에서 지금으로 치면 국토교통부 격인 동관 책이 유실되었다. 이를 대신해 춘추전국시대 <고공기>라는 책이 동관의 내용을 대신하고 있다. <고공기>에 궁궐을 중심으로 종묘는 좌측에, 사직은 우측에 세운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조선의 수도 한양도 계획되었다. 궁궐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세워 새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종묘와 사직을 좌우로 가르는 방위기준은 무엇일까? 바로 음양 이론이다. 남쪽을 향해 앉은 임금을 중심으로 좌측인 동쪽은 해가 뜨는 밝은 곳이라 양의 방향이다. 반대로 우측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음의 방향이다. 음양 중에 어두운 음보다는 밝은 양을 우선으로 쳤다. 그래서 영의정을 중심으로 동쪽에 서는 좌의정이 서쪽에 서는 우의정보다는 서열이 높다.
종묘는 조상 신을 모신 정신적인 공간이다. 밝은 양의 성질로 보아 해가 뜨는 동쪽에 세운다. 사직은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물질적인 공간이다. 음의 성질로 보아 해가 지는 서쪽에 둔다. 동쪽의 종묘는 나라의 통치이념을 상징한다. 서쪽의 사직단은 백성들이 먹고사는 민생을 상징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이 두 개의 중요한 축으로 나라를 경영했다. 그래서 종묘사직은 나라를 대표하는 의미로 쓰였다.
종묘는 조선왕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
종묘는 1395년(태조 4년) 9월에 신실 5칸, 좌우협실 2칸이 달린 총 7칸으로 완공되었다. 태조는 곧바로 개경에 있는 추존 왕들(목조·익조·도조·환조)의 위패를 모셔와 봉안했다. 몇 년 후 태종은 일자로 된 정전의 좌우에 월랑(月廊)을 남쪽으로 내 달았다. 이는 사람에게 좌우 팔이 있는 것처럼 건물에 안정감을 준다. 자세히 보면 동쪽 월랑은 벽이 없이 열려 있고, 서쪽 월랑은 벽으로 건물 전체를 막아 놓았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니 열고,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니 닫아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 이는 동양사상인 자연의 순환원리를 건물로 구현한 것이다.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조상의 제사는 4대 봉사를 한다. 4대조인 고조할아버지까지만 기제사를 올린다. 5대조부터는 신주를 땅에 묻고 더는 기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5대조부터는 10월에 문중이 모여 지내는 시제로 대신한다.
세종 1년(1419년)에 정종이 승하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네 분의 추존왕과 태조 신위로 정전의 5칸이 다 차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첫 추존왕인 목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정종을 끝자리에 모셔야 한다. 상왕이었던 태종은 5대조의 신주를 없애지 말고 별묘(別廟)를 지어 따로 모시라 했다. 이렇게 해서 별묘인 영녕전이 정전의 서쪽에 새로 6실 규모로 세워졌다.
왕조가 이어지면서 정전과 영녕전은 계속 증축을 해야 했다. 정전은 1546년(명종 1년)에 4실을 증축해 총 11실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1년)에 중건되었다. 1726년(영조 2년)에 4실, 1836년(헌종 2년)에 4실을 더 증축하여 총 19실에 49위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정전에는 나라에 공을 세워 불천위가 된 왕들을 모셨다.
처음 6실로 신축되었던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광해군 때 10실로 중건되었고, 현종 때 2실, 헌종 때 4실을 증축하여 총 16실로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 가운데 솟을지붕에는 태조의 4대조 추존왕들을 모셨다. 나머지 신실에는 재위 기간 중 공을 이루지 못했거나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 영녕전 전경. 추존왕들과 생전 공이 적은 34위 신주가 모셔져 있다.
- 종묘의 삼로. 가운데는 신(神)로, 정전을 중심으로 동쪽은 왕이, 서쪽은 세자의 길이다.
예악이 살아 숨 쉬는 종묘
종묘의 중심인 정전은 한 건물 안에 여러 신실이 함께 있는 구조다. 신실 앞에는 기둥들이 나란히 서 있고, 열린 툇간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 장소는 망자와 산자가 만나는 극적인 공간으로 제례 때에는 제주(祭酒)를 제사상에 올린다. 정전은 단일 목조건물로는 최대 규모로 지붕 길이만 101m다. 신실 내부도 이 길이만큼 통으로 열려 있어 장엄한 공간을 연출한다. 신실 북쪽에는 신주와 돌아가신 왕의 공덕을 기리는 책과 인장을 두는 감실(龕室)이 있다. 감실은 발을 내려 19실 각각의 혼을 분리한다. 감실 앞에 탁 트인 공간에는 제례 상이 놓여 있다. 이렇게 한 칸마다 1실이 이루어져 한 왕조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다. 19실이 크기는 약간씩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이 때문에 500년의 시차를 두고도 신실을 쉽게 증축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종묘 제향은 정시제·임시제·속절제·장제가 있었다. 지금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종묘제례 의식을 봉향하고 있다. 선왕조 문무의 덕을 찬미하는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의 음악과 춤으로 구성된 제례 의식이다. 누구나 참관할 수 있으니 직관을 강력 추천한다.
- 월대 위에서 연주하는 악공과 일무원
- 동월랑에서 본 정전 상월대와 툇간. 망자와 산자가 만나는 극적인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