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E ON
- 무비 트래블
-
바다, 사랑의 시작과 끝
영화 <봄날은 간다>와 강원도 동해·삼척
- 글, 사진. 채지형(여행작가)
-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즈음, 나에게는 통과의례가 하나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울림은 여전하다. 아름답고 아릿하고 아련하다. 찬란한 ‘봄날’을 맞이하고 누리고 보내는 마음이 스크린에 다큐멘터리처럼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가슴은 먹먹해진다.

섬세한 감정이 담긴 그림같은 강원도 풍경
영화는 주인공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겨울에서 봄까지 이어진 사랑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사랑의 풋풋한 시작부터 설렘 가득한 연애, 일상을 함께 보내는 모습, 애달픈 이별의 순간까지 영화를 보는 관람객은 ‘내 이야기’인 듯 감정이입 하며 영화를 쫓는다. 영화는 시간과 세대를 초월해 ‘봄날’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덕분에 개봉한 지 20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다.
영화를 빛나게 해주는 부분은 공간이다. 남자주인공의 직업은 사운드 엔지니어로, 상우와 은수는 강원도 곳곳으로 소리를 채집하러 여행을 다닌다. 신흥사에서는 눈 오는 날 풍경 소리를, 맹방해수욕장에서는 파도 소리를 담는다. 삼척을 비롯해 강릉, 동해, 태백, 정선의 자연이 화면에 잔잔하게 펼쳐진다. 영화를 보면 절로 ‘저기 어디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한때는 ‘<봄날은 간다> 촬영지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여행사 상품이 만들어질 정도로, 상우와 은수의 흔적을 쫓는 여행이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동해시 삼본아파트 “라면 먹고 갈래”, 바로 그 장소
강원도의 매력적인 자연을 보여주지만, 영화의 공간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은수의 아파트와 주변이다. “라면 먹고 갈래”라는 은수의 한마디로 연애가 시작되고 은수를 보고 싶다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온 상우와 은수가 뜨겁게 만나는 곳, 그리고 상우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애처롭게 말하던 공간이다.
사랑은 변했지만, 다행히 영화를 촬영한 아파트는 남아 있다. 영화 촬영지로 널리 알려진 강릉, 삼척이 아닌 동해시 어달동에 있는 삼본아파트다. 동해시는 강릉과 삼척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로, 도시와 어촌마을의 모습을 모두 품고 있다. 삼본아파트 앞에는 영화 촬영지에 대한 흔한 표지판 하나 없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눈 밝은 이들은 이곳을 놓치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해맞이길’ 한쪽에 서서 은수가 금방이라도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 듯한 101동 창문을 바라본다. 은수와 상우가 만나고 헤어지던 삼거리에 서서 상우와 은수를 상상한다. 고맙게도 영화처럼 버스정류장도 남아 있다. 위치가 조금 바뀌었고 오가는 버스도 다르지만,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상우의 차가 서고 버스가 멈추던 자리 뒤로는 바다가 펼쳐진다. 아파트 주변 공터에 묵호주공아파트가 들어섰지만, 바다가 보이던 자리는 그대로다. 영화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는 묵호항으로, 싱싱한 해산물과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하다. 명태와 오징어잡이가 호황을 누리던 시절 개들도 만 원 짜리를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풍요로운 어촌이었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묵호로 몰려들던 시절, 소설가 심상대는 ‘술과 바람의 도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묵호의 옛 모습은 벽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삼본아파트 앞에서 은수와 상우를 떠올린 후에는 논골담길을 걸으며 벽화를 감상하고 어선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등대를 살펴보면 좋다. 등대 앞에는 마치 바다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안겨주는 도째비골 스카이워크와 해랑전망대도 있으니, 놓치지 말자.

삼본아파트 앞에는 흔한 표지판 하나 없지만,
눈 밝은 이들은 이 공간을 놓치지 않는다.



신흥사, 맹방해수욕장으로 이어진 소리의 길
영화가 빛나는 이유 중 하나는 소리다. 계절의 변화와 장소의 매력을 소리에 담았다. 대나무밭에서 ‘쏴악 쏴악’ 소리를 담는 장면부터 눈 오는 사찰에서 소리, 거친 파도 소리가 마음을 강하게 흔든다.
소리를 채집한 공간은 주로 삼척에 있다. 많은 이들 가슴 속에 각인된 장면 중 하나는 새벽 산사에서 풍경 소리를 담는 장면이다. 조용히 눈 내리는 산사의 고요함을 깨는 풍경 소리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완성했다. 낭랑한 풍경 소리가 퍼질 때 은수는 소리 없이 상우 옆에 앉는다. 사랑이 스며드는 순간을 시적으로 묘사한 장면이다.
이 장면을 촬영한 곳은 삼척시 근덕면에 있는 신흥사다. 자그마한 사찰이지만, 역사는 깊다. 838년 신라시대 창건 후 지흥사, 광운사, 운흥사 등 여러 이름을 거쳐 1821년부터 신흥사로 불리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설선당(說禪堂)이 있고 오른쪽에는 심검당(尋劍堂)이 있다. 두 곳은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어있다.
신흥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쏴아아’ 대숲 소리를 찍은 대나무 숲이 있다. 강화순 할머니댁 뒤편 대나무숲으로, 하늘을 찌를 듯 대나무가 쭉쭉 뻗어있다. 대나무 숲과 소담한 할머니집이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이곳을 찾아갈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다. 실망하기 쉽기 때문이다. 대나무숲은 관리가 잘 안 되어 있어, 숲의 흔적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 가지 더. 할머니 집은 남아 있지만, 아쉽게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마지막으로 둘러볼 코스는 맹방해수욕장이다. 수심이 얕고 백사장이 넓어 사랑받는 해변으로, 이곳에서 상우와 은수가 파도 소리를 녹음했다. 편안하게 서로에 의지하며 앉아있지만, 높이 치는 파도는 변하는 사랑을 암시하는 듯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사랑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것, 파도처럼 밀려오고 쓸려나간다는 세상의 이치에 고개를 끄덕인다.
영화를 쫓아 맹방에 갔지만, 2022년의 맹방에서 만난 건 BTS의 ‘버터’였다. BTS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삼척시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맹방해수욕장의 외나무다리도 ‘인생샷’ 포인트로 인기였다. 고즈넉한 바다를 만나기 위해 덕봉산을 올랐다. 해변에 있는 높지 않은 산으로 오르기 어렵지 않았다. 전망대에서 맹방해수욕장을 바라보며, 멀리서 달려드는 큰 파도를 내려다봤다. 멈춰있는 듯한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영화 OST를 흥얼거리며, <봄날은 간다>와 함께 한 여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