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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계획 이야기⑥
국내 최초 골프장에서 국내 최초 어린이공원으로
– 어린이대공원- 글. 최성원(서울지역본부 차장)
- 어린이 전용 공원시설이 전무하였던 1970년대, 서울 시내에 비로소 어린이대공원이 탄생하였다. 어린이대공원이 탄생했던 간략한 역사적 배경과 도시계획적 영향을 알아보자.
대한민국 최초의 골프장 ‘서울칸트리구락부’
2020년대 현재, 수도권 지역에는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시설들이 즐비하지만, 아직 소득 수준이 낮았던 1970년엔 변변한 어린이 전용 놀이시설이 없었다. 일제시대, 조선시대 왕궁의 일부였던 창경궁을 격하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창경원’이 있었지만 정식 놀이동산 및 동물원이 아니었기에 현재 광진구 능동에 위치한 어린이대공원이 이 나라 최초의 어린이공원인 셈이다.
능동의 지명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인 순명황후민씨(명성황후의 고모)의 능터에서 유래한다. 1927년, 일제는 이 능터 일대를 조선 최초의 18홀 골프장인 ‘서울칸트리구락부’(클럽의 일본발음)로 만들었고, 이후 태평양 전쟁 시 비행장 등의 용도로 사용되다가 해방 이후 이승만 시절에야 골프장 기능을 되찾게 된다.

- 1973년 어린이대공원 개원 시기 항공 사진이다. 골프 코스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골프장 이전 지시
1970년대 한국의 1인당 소득은 200달러 내외로, 점차로 소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골프장 이용객들이 늘어났다. 서울CC회원은 당연히 국내 최상류층에 속해 있다는 반증이었고, 박정희 대통령 또한 그곳을 자주 찾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70년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어 국민의 근면·자조를 강조하는 시기였고, 도심에서 한가로이 골프를 즐기는 사회지도층에 대한 인근 주민의 반감 등을 고려해 박정희 대통령은 “골프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어린이를 위한 대공원을 조성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공원의 콘셉트는: 디즈니랜드 VS 잔디공원
7대 대통령 선거 직전인 1971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선거 유세에 발맞춰 ‘어린이대공원 건설계획’이 발표된다. 이때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조경의 개념, 특히 공원 개발 사례는 거의 전무했으므로 어린이대공원을 어떤 식으로 조성할 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초기에는 ‘디즈니랜드’식의 테마파크 개념으로 구상되었으나 재정적 한계와 기술적 제약의 문제가 있었다. 이에 ‘도시 공해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인공적 놀이기구에 파묻히게 하기보단 지금 골프장 상태 그대로 잔디와 숲속에서 뛰어놀게 계획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짐에 따라 당대 유명한 건축·도시계획·미술 전공 교수들에 의해 기본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로 인해 계획의 핵심은 ‘잔디밭의 원형 보전, 구역별 놀이터 설치, 식물원·동물원·야외음악당 등의 시설 설치’로 정해진다.

- 개원 이래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어린이대공원 분수

- 어린이대공원의 현재 항공 사진. 개원 당시보다 다양한 시설이 입지했지만 도심 내 공원으로서 여전히 훌륭한 녹지를 제공 중이다
180일 강행군을 거쳐 1973년 어린이날에 개원하다
1972년 11월 기공식 이후 차년도 5월 5일 어린이날에 맞춘 개원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각 부문별로 유수의 전문가 및 교수가 직접 공사를 전담했는데, 일례로 서울대 김세중 교수가 맡았던 공원 입구 분수대는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기능과 화려함이 여전하다. 1996년 마이클잭슨이 내한 공연 당시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했다가 이 분수에 반해 자신의 집에 비슷한 것을 만들고자 분수대 조각가를 수소문했을 정도다.
서울시 입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공원조성 비용으로, 선례가 없으니 어느 정도의 시설을 조성해야 하며 비용이 어느 정도일지 추정이 불가능했다.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은 여러 민간업체에게 후원을 부탁해야 했고, 일반 시민들 또한 수많은 기증을 해주었다. 한편 자연을 강조한 공원이라 해도 최소한의 놀이 시설이 필요했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인인 재일교포의 투자를 통해 대공원 후문 쪽에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놀이기구가 갖춰지게 된다.
1973년 5월 5일, 예정대로 어린이대공원은 가까스로 개원할 수 있었다. 정원 5만 명의 시설에 60만 명이 몰려들 정도로 대단한 인기였고, 1976년 경기도 용인시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 개원 전까지는 서울 내 유일한 어린이공원으로서 꾸준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여담으로 가수 이적의 노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은 부모님 손을 붙들고 갔던 곳에서 버려진 아이의 심정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이를 버리는 날, 그날은 좋은 옷 입히고 사달라는 것 다 사주고, 솜사탕 같은 것 하나 들게 하고 부모가 사라져 버리잖아요.” 이처럼 아이를 버리는 날 마지막으로 데려가는 장소로 선택할 만큼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이였다는 방증일 것이다.
어린이대공원 건설 그 이후
어린이대공원은 서울 시내에 사는 어린이라면 꼭 가야 하는 필수 방문지가 되었으므로, 이곳을 중심으로 시내버스 노선의 일부 개편이 진행됐다. 상대적으로 낙후했던 서울 동부지역의 발전이 촉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어린이대공원 부지 면적은 21만 평에 달한다. 당시 경제 여건을 고려했을 때 넓은 면적에 대해 기타 시설에 의한 부지 잠식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통일교 재단에 의한 어린이 리틀엔젤스 예술학교(이후 선화예중·고로 변경), 당초 남산 자락에 있었지만 접근성 개선을 이유로 어린이대공원으로 들어온 어린이회관 등이 있다.
전 세계 숱한 개발도상국을 돌아보면 양질의 어린이공원이 조성된 사례를 찾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데,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 후대를 위해 조성된 이 어린이대공원의 가치가 새삼 대단해 보인다.
- 참고문헌
- • 서울도시계획이야기 3권, 손정목 (2003)
- • 이미지 출처 : 서울시 및 서울역사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