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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비 트래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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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조와 로맨틱함이 깃든
한 폭의 그림 같은 정원영화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의 촬영지, 스타우어헤드(Stourhead)
- 글·사진. 진회숙(여행 작가)
-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영화 <오만과 편견>에 보면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비를 맞으며 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이다. 그 다리가 잉글랜드 남부에 있는 스타우어헤드 가든에 있는데 그 아름다운 풍경에 모두들 넋을 잃고 만다.
- 팔라디안 다리의 가을 풍경
- 풍경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스타우어헤드
만약 모든 준비가 완벽하면 실망할 수 있으니까.”
남녀의 묘한 이끌림, 이를 방해하는 오만과 편견
우리나라에서 2006년 개봉한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은 제인 오스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사회적 계급과 신분을 중시하던 18세기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과 오해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는 사랑과 결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두 남녀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감각적이고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베넷 가의 다섯 딸(제인,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 메리, 키티, 리디아)들은 부유하진 않지만 화기애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들의 어머니는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 신랑감에게 딸들을 시집보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 중 둘째인 엘리자베스는 보다 폭넓고 주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자신만의 삶을 살고자 한다.
어느 날 명망 있는 가문의 빙리와 그의 친구 다아시(매튜 맥페이든)가 대저택에 머물기 위해 오면서, 베넷 가엔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맏딸 제인은 빙리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 반면, 엘리자베스는 잘난 체하는 다아시를 만난 뒤, 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끼면서도 오해와 다툼을 반복하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우연히 다아시가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이란 이유로 빙리와 제인의 결혼을 반대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다아시는 영리하며 솔직한 성격의 엘리자베스에게 점차 끌리게 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호숫가에서 마침내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다아시를 오만하다고 여기는 엘리자베스는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이 영화는 원작 소설의 무대와 시대 배경에 충실할 뿐 아니라 전장면을 영국에서 촬영했다. 바실든 파크, 벌리 하우스, 채스워스 하우스 등 16~18세기에 지어진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배경으로 나온다. 특히 스타우어헤드 가든의 아폴로 신전 등은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다 거절당하는 장면의 배경이 되어 관객들에게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으로 인상을 남겼다.
‘인증샷’ 명소, 팔라디안 브리지
스타우어헤드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영화 <오만과 편견>에 나왔던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호수 위에 놓여 있는 돌다리와 그 너머로 보이는 판테온이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답다. 이 지점은 스타우어헤드 중에서 가장 사진 찍기 좋은 장소, 그야말로 ‘인증샷’의 명소라고 할 수 있다.
이 다리는 팔라디안 브리지(Palladian Bridge)라고 한다. 팔라디안 양식은 고대 그리스, 로마 건축물처럼 비례, 대칭, 간결함을 강조한 양식을 말한다. 16세기 베니스 출신의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주창한 양식으로 18세기 전반 영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다리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순수한 돌다리다. 다리 상판은 가장자리보다 가운데가 살짝 올라간 형태를 띠고 있으며, 하단은 5개의 크고 작은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다리 위에 잔디가 덮여 있는 점이 특이하다. 잔디가 깔린 다리는 처음 보는데, 그 위로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지극히 단순한 형태의 이 다리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주변의 풍광 때문이다. 풍경의 아름다움은 주변 모든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된다. 팔라디안 다리 주변의 풍경이 그렇다. 다리 밑을 흐르는 호수, 그 주변의 초원과 꽃, 나무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판테온이 한데 어우러져 미학적으로 완벽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정원에 직선이나 기하학적인 구도가 아닌 자연스러운 곡선이 등장한 것은 영국 풍경 정원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들어가 호숫가를 걷다보면, 키가 굉장히 큰 나무와 흐드러지게 핀 큰 꽃들을 만날 수 있다. 철쭉과의 나무라고 하는데, 일단 나무의 키와 꽃송이의 사이즈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꽃 색깔도 다양하다. 빨간색, 노란색, 꽃분홍색, 분홍색, 보라색, 흰색 등 온갖 색깔의 꽃들이 초록 바탕의 캔버스에 다채롭게 피어 있다.
호수를 따라 구불구불 나 있는 산책로를 걸으면 아주 은밀한 공간을 만날 수 있다. 호숫가에 숨겨놓은 듯 만들어 놓은 지하 동굴이다. 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어딘가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바로 여기가 스타우어 강의 발원지다. 이렇게 은밀한 곳에 물의 기원, 생명의 기원을 숨겨 놓다니. 물소리를 들으며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갑자기 동굴이 환해진다. 위에 뚫려 있는 천장으로 빛이 들어와 안을 환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그 아래로 강의 신과 샘물의 님프가 보인다. 특히 비스듬히 누워있는 님프의 모습이 매혹적이다. 동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아치형의 창이 있다. 그 창으로 호수가 보이고, 그 너머에 있는 팔라디안 다리까지 보인다. 풍경이 마치 액자 속에 담긴 그림 같다.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주변을 로맨틱하게 만드는 아폴로 신전
동굴에서 나와 언덕을 오르면 판테온이 나온다. 판테온은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있는데, 앞에 있는 호수를 만들 때 퍼낸 흙을 쌓아서 조성한 것이다.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기 때문에 판테온에서는 정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호수 건너편 팔라디안 다리에서 바라볼 때, 판테온은 무척 신비롭게 보인다. 판테온이라는 것이 원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모두 모아놓은 곳이 아닌가. 그만큼 공간적, 시간적으로 까마득한 곳이다. 판테온뿐만이 아니다. 스타우어헤드에는 팔라디안 다리, 아폴로 신전, 오벨리스크, 플로라 신전 등 옛 양식으로 지은 건축물이 곳곳에 있다. 이러한 양식의 건축물을 정원에 지어놓은 까닭은 무엇일까.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옛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였을까. 정원에 이야기를 입히고 싶었던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이 정원의 ‘서사’보다는 ‘서정’에 마음이 더 끌린다. 옛 양식의 건축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그 신비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멀리서 보는 것이 훨씬 더 좋다. 호수 건너편 언덕 위에 서 있는 아폴로 신전도 그랬다.
아폴로 신전은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 비를 철철 맞고 온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가 언니의 행복을 방해한 오만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청혼하자 당신 같은 오만한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며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물론 그 거절의 배경에는 자신의 계급에 대한 열등감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이렇게 청혼의 결과가 거절로 이어진 아폴로 신전에서의 대화가 로맨틱할 리 없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로맨틱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이 아폴로 신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대에는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아폴로 신전. 이런 설정에서는 무엇이든 로맨틱할 수밖에 없다. 엘리자베스의 등 뒤로 뿌옇게 보이는 비 내리는 호수 풍경도 인상적이었다.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서 아폴로 신전은 멀리서 그냥 바라만 보게 되었다.
풍경 정원의 매력은 인위적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타우어헤드는 정말 자연 같은, 풍경 정원의 진수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 아폴로 신전이 보이는 풍경
- 인공호수 안에 있는 작은 섬
영국식 ‘풍경 정원’의 진수 스타우어헤드
스타우어헤드는 부유한 은행 가문 출신의 헨리 호어 2세가 디자인했다. 스타우어헤드는 ‘스타우어 강의 발원지’라는 뜻이다. 이 정원에 7개의 크고 작은 샘이 있는데, 바로 여기서 스타우어 강이 시작된다. 헨리 호어는 부유한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개인적인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부인이 마흔 살이 되기도 전에 죽고, 아들마저 이탈리아 여행 중 천연두에 걸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부인이 죽고 난 후, 그는 상심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유럽 부호들 사이에서는 서양 문명의 발상지를 찾아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는 이른바 ‘그랜드 투어’가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헨리 호어 역시 이 행렬에 동참해 3년 동안 이탈리아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다녔다. 그때 이탈리아의 풍경을 담은 클로드 로랭, 니콜라스 푸생, 가스파르 푸생의 풍경화에 큰 감명을 받아 이 그림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림 속 경치를 자신의 정원에 직접 구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거대한 토지에 자기만의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그림 같은’ 정원을 지향하는 이른바 ‘풍경 정원(Picturesque Garden)’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헨리 호어는 이탈리아 여행과 풍경화 수집을 통해서 쌓은 미적 감각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풍경 정원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영국식 풍경 정원의 진수 스타우어헤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