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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트래블
  • 산티아고 순례길의 선물

    영화 <나의 산티아고(I’m Off Then)>의 촬영지, 산티아고(Santiago)

    •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
  • 영화 ‘나의 산티아고’는 코미디언 하페가 과로로 쓰러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지고 독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던 하페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을 듣고, 일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긴 휴가를 갖게 된다. 처음 생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소파에 누워 방황하던 하페는 불현듯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생장피데포르에서 걷기 시작해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42일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
나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볼까?

영화는 1일차 생장피데포르에서 42일차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하페의 걸음에 맞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직하게 진행된다. 그래서 극영화지만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도 같다. 실제로 영화의 원작은 500만부 이상 판매된 에세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같은 TV 여행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 길을 이미 걸었던 사람은 영화 속에서 익숙한 풍경을 만나면 반가워하고, 아직 그 길을 걷지 못한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저 길 위를 언젠가 나도 걸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꿈을 꾸게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페인과 프랑스 접경에 위치한 순례길이다.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성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로, 총 거리는 800㎞에 이른다. 대개 하루에 20~30㎞ 정도씩 걷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려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산티아고 길 완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 로망이고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이다. 해외여행이 어려운 지금도 산티아고 길 어딘가엔 한국인이 있고, 오늘도 그들은 걷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걷고 있는 그 마음들을 생각하니 애틋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한편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면 무엇보다 그 길이 그립다.
팬데믹이 끝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번 가볼까? 간다면 한 달 이상 휴가를 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회사를 그만둬야 가능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한 번에 완주하기보다는 나누어 완주하는 사람이 더 많다. 2019년 순례 증명서를 받은 사람 중에 시작 지점인 생장피데포르에서 시작한 사람은 9.5%에 불과하다. 반면 115㎞ 지점인 사리아에서 출발한 사람이 27%나 된다. 우리가 제주의 올레길을 1코스부터 끝까지 한 번에 완주하지 않는 것처럼 근처에 거주하는 유럽인들은 휴가가 생길 때마다 틈틈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고, 이어 걷는다. 물론 한국인들은 이 먼 곳에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몰라서 기왕이면 완주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일정에 따라 출발 도시를 정하고, 그곳에서부터 길을 걸으면 된다. 어디에서 출발하든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될 것이다.
그러니 각자 낼 수 있는 휴가를 활용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 된다. 가령 폰페라다에서 출발한다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220㎞ 정도 된다. 하루에 20㎞ 정도 걷는다고 생각하면 열흘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100㎞만 걸으면 순례 증명서를 받을 수 있는데, 그래서 115㎞ 지점인 사리아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사리아에서 출발한다면 5~6일이면 충분히 걷는다.

포도밭을 가로지르는 길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성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로, 총 거리는 800㎞에 이른다.
순례길을 인도하는 이정표가 많아 길 잃을 염려는 없다. 로마 시대의 성이 남아 있는 도시, 폰페라다
길 위를 함께 걷는 사람들

“나 이제 떠날 거야. 친구들에겐 이 말만 남기고 길을 떠났다”라는 말로 영화 <나의 산티아고>는 시작한다. ‘나 이제 떠날 거야.’ 는 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하다. 하페라고 해서 딱히 질문이 있어 그 답을 찾기 위해 떠난 길은 아니다. 그는 이야기한다. “중요한 건 걷는 것이다. 전 구간 완주하기.”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의 열악함에 치를 떨기도 하고, 폭우를 만나 고생하기도 한다. 그를 알아보는 독일인들에게 시달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말한다. “순례자들과 절대 엮이고 싶지 않다. 저들은 대체 왜 순례를 할까?”, “여행 뒤에도 시작하기 전과 똑같을 거다.
완주나 해낸다면 말이다.” 툴툴거리며 시작된 이야기가 길을 걷는 동안 천천히 달라진다. 그건 길을 걸으며 만난 자기 자신 덕분이기도 하지만, 길 위를 함께 걷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딸을 먼저 보내고, 딸의 마음을 알고 싶어 여러 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스텔라와 취재차 걸으며 하페와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는 기자 레나는 길을 걷는 목적도 방식도 다르다. 하페는 호텔에서 자고, 레나는 알베르게에서 묵으며, 스텔라는 매일 밤 텐트를 친다. 실제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야말로 ‘순례자’의 마음으로 걷는 독실한 신자도 있고, 걷는 것만으로 내가 변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떠난 이도 있다. 사진으로 본 풍경에 반해 카메라를 목에 걸고 걷는 사람도 있고, 새로운 ‘도전’을 경험해 보겠다는 이유로 무작정 시작된 여정도 있다.
완주함으로써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길 위에서는 크고 작은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가령 하페처럼 엄마를 잃고 방황하던 어린 나를 만나 위로 받는 마법 같은 경험, 그리고 각기 다른 마음으로 길 위에 있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친해지는 기적 같은 것. 하페와 스텔라, 레나가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위로하는 것처럼 국적도 성도 직업도 다른 사람들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한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땅을 밟고 있는 셈이지만, 발에 물집이 생기고 없어지고 굳은살이 박이는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과도 정이 든다. 길과 정이 드는 만큼 일정과 발걸음이 비슷해 그 길 위에서 자연스레 자꾸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도 정이 쌓인다. 각자의 나라로 돌아와 각기 다른 삶을 살게 되고 잊혀진다고 해도 길 위를 함께 걸었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
그리고 사실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는 선물은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내 짐을 내 어깨에 메고, 나의 두 발로 걸으며, 몸의 소리를 들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걷고, 먹고, 자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단순한 시간이 그대로 선물이다. 음악을 들으며 걷다가, 배가 고프면 샌드위치를 꺼내 먹고, 다리가 아프면 아무데나 앉고,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가고, 그러다 다음 도시가 나오면 제일 처음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생맥주를 한 잔 마시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이 길 위에 잘 왔구나 싶어진다.

걷다가 십자가를 만나면 각자의 사연을 남기곤 한다. 영화 <나의 산티아고(I’m Off Then)>의 스틸 컷. 주인공 하페가 오늘 종착지에 다다르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는 선물은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짐을 메고, 두 발로 걸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걷고, 먹고, 자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단순한 시간이 그대로 선물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다가올수록 순례자들은 늘어난다. 각자의 여정을 완주하고 도착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성당. 그곳에는 온갖 감정이 넘쳐 흐른다. 누군가는 환호성을 터뜨리고, 누군가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배낭을 내려놓은 채 그늘에 앉아 한가로운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여정이 끝난 것을 축하한다. 그리고 “부엔 까미노(Buen Camino, 평안한 순례의 길 되시길)”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앞으로 각자의 인생에도 부엔 까미노!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두 마리의 반려견과 함께 걷던 순례자
TIP
산티아고 순례길 TIP

① 숙소는 알베르게를 고집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영화 속 공립 알베르게들은 열악한 곳이 많지만, 큰 거점 도시에는 좋은 시설의 사설 알베르게들도 많다. 사설 알베르게는 공립과 가격 차이가 크지 않고, 대부분 일회용 매트를 쓰기 때문에 베드버그(Bedbug) 걱정을 줄일 수 있다. 물론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에 도장도 찍어준다.

②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갔다면 음식 걱정은 없다. Sopa de Gallo라는 이 지방 수프가 시래기국과 거의 흡사하다. 한국인 여행자가 많아지면서 굳이 갈리시아가 아니더라도 까미노 내내 한국 라면이나 한국 음식을 파는 곳이 꽤 많은 편이다.

③ 순례 증명서는 걸어서 100㎞ 이상, 자전거로 200㎞ 이상 이동했을 때 발급해 준다. 그래서 보통 115㎞ 정도 거리에 있는 사리아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크레덴시알에 하루 2개 이상의 도장을 받아야 순례자 증명서 발급이 가능하다. 2021년부터 디지털 순례자 여권이 도입되어 QR 코드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④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면 발바닥 물집은 필연적이다. 굳은살이 생기기까지 3~4일이 가장 괴롭다. 물집을 터트리라는 조언도 있고, 그대로 두라는 조언도 있는데, 그대로 두되 밴드로 완전히 밀착해서 매우 단단하게 붙이는 방식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