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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트래블
  • 여기에선 잠시 쉬어가도 좋아

    영화 <리틀 포레스트>와 경북 군위

    • 글, 사진. 채지형(여행작가)
  • 잔잔함을 좋아한다. 30년 빌딩 숲 생활은 소소하고 느린 삶으로 향하게 했다. 아담한 텃밭에 방울토마토를 심고 고추를 가꾸는 도시농부를 시작했다. 흙을 만지는 일은 상상 이상의 기쁨을 안겨줬다. 경이로움은 우주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매일 밟는 땅과 공기에도 있었다.
혜원의 사계절을 만나다

고마운 흙과 정직한 땀에 빠져 있을 때, 한 편의 영화가 다가왔다. 간결하고 담백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였다. 임순례 감독의 2018년 작품으로, 팍팍한 서울살이를 뒤로하고 고향에 내려온 주인공 혜원(김태리)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리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짠했다가 안타깝다가 뭉클했다가 따스했다. 기막힌 반전 하나 없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혜원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한 순간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한동안 영화를 잊고 지내다, 얼마 전 <리틀 포레스트>가 다시 생각났다. 드라마 ‘스물하나 스물다섯’은 김태리 배우의 사계절을 담은 영화를 떠오르게 했다. 4년 만에 <리틀 포레스트>를 돌려보고, 다음 날 검색창에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를 넣었다. 경상북도 군위군 미성리라는 낯선 지명이 나타났다. 서울에서 차로 4시간은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녀가 밀가루를 치대고 곶감을 만들고 막걸리를 빚던 아늑한 공간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묶어둘 순 없었다.

혜원의 집 내부. 촬영을 막 마친 듯 잘 정리되어 있다.
곶감 만드는 장면을 생각나게 하는 소품.
부엌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대로 남아 있는 영화 속 공간들

이른 새벽 출발해 몇 번의 휴게소를 거친 후, 한적한 마을 길로 들어섰다. 어디쯤일까,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펴보니 표지판이 있었다. <리틀 포레스트> 영화촬영지로 가는길을 알려주는 화살표였다. 혜원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 반가웠다. 백로가 한가로이 노는 논을 지나고, 작은 개울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소담한 마을이 보였다. 또 다른 화살표를 따라 들어가니, 영화를 품은 아늑한 집이 나타났다.
세월이 흘렀지만, 혜원의 집은 촬영을 막 마친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처마에는 곶감을 만들기 위해 혜원이 다듬던 감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비록 모형이었지만, 다정한 영화 속 장면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감이 걸린 마당에는 마침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어, 잠시 눈을 감고 따스함을 온몸으로 받았다. 다행히 혜원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롯이 영화 속 장면을 소환할 수 있는 완벽한 시간이었다.
마당은 한없이 고즈넉해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뒷산에서 명랑하게 우는 새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혜원이 도시에서 집에 돌아온 때처럼, 슬그머니 미닫이 문을 열고 안을 기웃거렸다.

주인공 혜원이 타던 자전거에 올라 시골길을 달려보자.
영화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간 기분이 든다.
단순하지만 부족함 없는 삶

생각보다 공간이 넓진 않았다. 아담한 거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영화의 주요 공간인 주방이 있었다. 10여 평쯤 될까. 단순하지만 부족함 없는 삶이 느껴졌다. 뭐든 넘치는 도시에서 채워지지 않은 혜원의 허기를 달래준 자연의 선물과 공기가 구석구석 담겨 있다. 혜원의 엄마(문소리)가 요리하며 내다보던 부엌 가운데 서서, 작은 창 너머 펼쳐진 초록 들판으로 눈을 던졌다. 그저 초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해보고 싶은 의욕이 올라왔다. 지쳐 있던 혜원도 이곳에 서서 그런 힘을 받지 않았을까 싶었다.
서성이다 마루에 있는 난로 앞에 발길이 멈췄다. 고구마를 나누어 먹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울고 웃던 혜원과 은숙, 재하. 그들의 우정은 보는 이들 얼굴에 미소를 그려줬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 제목처럼, 시시콜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인생의 큰 보물이다. 문득 바쁘다고 연락하지 못한 내 친구 얼굴이 하나둘 겹쳤다. 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옥수수 파티나 열자고 연락해야 겠다.

설렁설렁 자전거 타고 시골길 달리기

탁자 위 놓여있는 노트에는 이곳에 온 이들의 사연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찾은 이들의 즐거움과 설렘, 기대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이들이 자신만의 영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영화의 공간이 남아줘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마웠다.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다시 돌린 건 마당에 있는 자전거였다. 영화 속 혜원이 타던 바로 그 자전거라는 설명도 친절하게 붙어있었다. 자전거를 살살 끌고 나와 가지런히 난 시골길을 설렁설렁 달렸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바람을 가르며 개울과 숲 사이를 달리다 보니, 영화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코스는 동네 벽화였다.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시간일 거라 믿어’ 등 영화 속 대사가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어우러져 있어,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레트로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화본역.
증기기관차에 물을 대던 급수탑.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모습도 색다르다.
화본역에서 역무원 기념사진도 찰칵

벽화까지 감상한 후, 혜원의 집에서 7km 정도 떨어진 화본역으로 향했다. 혜원의 오랜 친구 재하가 옛 여자친구와 어색하게 마주한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도 꼽히는 화본역은 영화를 위해 일부러 만든 세트장처럼 멋지다.
1936년 12월 준공 이후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쳤는데, 일제 강점기에 건축된 역사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레트로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기차를 타지 않더라도 입장료 천 원을 내면 아기자기한 역을 둘러볼 수 있는데다 역무원 모자를 쓰고 특별한 기념사진도 남길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진 않았지만, 화본역에서 빠트리면 안 되는 곳이 급수탑이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대던 곳으로, 화본역 급수탑은 전국에 몇 남지 않은 곳 중 하나다. 높이 25m의 급수탑 안에는 세월을 품고 있는 파이프 관과 환기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책을 펼친 소녀가 밖을 내다보고 있는 박상희 작가의 ‘급수탑에서 삼국유사를 펼치다’라는 작품이 설치되어 있어, 마치 전체가 작품처럼 다가온다. 혜원의 집과 화본역을 돌아본 군위 여행. 영화처럼 잔잔했지만, 맑고 밝은 에너지를 가득 품고 온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