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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트래블
  • 폭우 속 계단을 바라보며

    영화 <기생충>과 서울

    • 글, 사진. 채지형(여행작가)
  • 얼마 전 미국 출장지에서 만난 독일 기자는 영화 <기생충>의 팬이었다. 인상 깊은 장면을 끝없이 이야기하며, 자신의 ‘인생 영화’라고 강조했다. 기생충 촬영지를 보러 한국에 꼭 가고 싶다는 말로 우리의 대화는 마무리됐다. 집으로 돌아와 영화를 다시 보고 영화 촬영지로 발길을 옮겼다. 영화처럼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폭우가 쏟아졌다.
봉준호 감독이 ‘계단 시네마’라고 할 만큼, 영화 <기생충>에는 다양한 계단이 등장한다.
북아현동에 있는 이 계단은 기우가 박 사장 집으로 가기 위해 오르던 장면에 등장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21세기 한국영화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기생충>은 작품상,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 각본상 등 무려 4개 부문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다. 거대한 우주도, 세상을 구한 초인도, 육중한 장갑차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영화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영화는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 가족과 성공한 사업가 박 사장(이선균)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반지하와 호화 주택이라는 설정부터 극렬하게 대비된다.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이들과 선을 넘는 것을 경계하는 부자들이 마주치는 장면은 아슬아슬하다. 봉준호 감독은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긴장감과 어두운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처리하는 뛰어난 감각으로, 관객을 쥐락펴락한다.
사건은 박 사장의 저택과 기택의 반지하, 근세(박명훈)의 지하 벙커에서 일어난다. 대부분의 장면은 세트장에서 촬영됐다. 박 사장의 저택은 전주영화종합촬영소와 안성 디마종합촬영소에, 기택의 반지하집은 고양아쿠아스튜디오에 세트장을 지어 사용했다. 침수되는 장면 때문에 별도로 세트장을 마련해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택의 집을 세트로 제작할 때 모델로 삼은 곳이 있다. 바로 북아현동 다세대 주택이 모여 있는 동네다.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기생충 영화 촬영지를 따라가는 발길은 아현동에서 시작했다. 지도 앱에서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 충정로역에서 5분 정도 거리, 십수 년을 오가던 장소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봉준호의 영화는 우리 삶과 맞닿아 있는 어느 곳에선가부터 시작된다.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로 세계를 놀라게 한 원동력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 ‘우리 슈퍼’로 등장한 ‘돼지 슈퍼’. 슈퍼 앞에는 기우와 민혁이 소주잔을 기울이던 파라솔도 놓여있다.
자하문 터널에서 경복궁 쪽으로 내려오면 서촌이다.
서촌의 대오서점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헌 책방으로, 지금은 북카페로 운영한다.
서울의 곳곳이 영화가 되다

첫 번째 찾은 촬영지는 북아현동에 있는 돼지 슈퍼였다. 영화 속 ‘우 리 슈퍼’로, 이곳은 다행히 세트장이 아니었다. 아현동에서 40년간 영업 중인 가게로, 영화에서는 간판을 바꿔달았다. 이곳에서는 기우(최우식)와 친구 민혁(박서준)이 소주잔을 기울이던 장면을 촬영했다. 기우가 과외를 제안 받던 장면이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숨을 헐떡이며 언덕을 오르니, 돼지 슈퍼가 나타났다. 유리창에 붙은 ‘쌀 팝니다’라는 문구를 보니, ‘우리 슈퍼’가 맞았다. 외벽에는 아카데미 4관왕 수상을 축하하는 사진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소주 대신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 때문에 전기가 나가 에어컨이 들어오지 않네요. 이것 참.” 하는 주인장의 혼잣말이 나를 영화 속으로 밀어 넣었다.
기우와 민혁이 앉은 테이블에 앉아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다 왼쪽을 바라봤다. 골목 끝에는 기우가 박 사장 집으로 가려고 오른 계단이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이 길진 않았지만, 근처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근처 빌라 우편함에는 재개발에 대한 안내서가 가득 붙어있었고 전깃줄은 위태롭게 엉켜있었다. 골목 곳곳에는 알록달록 예쁜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전깃줄만큼 어지러운 마음에 꽃 한 송이가 위로처럼 다가왔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노량진에 있는 ‘스카이 피자’다. “그런 여자를 도려내려면 우리도 뭔가 준비를 해야겠다”며 가정부를 쫓아내기 위해 기정과 기우가 작전을 짜던 장소다. 골목 안에 자리한 동네 피자집으로, 영화 이후 찾는 이들이 많아 ‘기생충 촬영지’라는 표지판이 붙었다. 피자집 안에는 기택네 가족들이 접던 ‘피자시대’ 박스도 전시되어 있다.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
폭우 속 하염없이 내려가는 계단

기생충 촬영지를 쫓아간 여정 중 하이라이트는 자하문 터널과 그 앞 계단이다. 계단은 영화감독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다. 차이를 보여주기에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을 ‘계단 시네마’라고 했을 정도로, 영화에는 다양한 계단이 등장한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욕실 계단, 집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 등 여러 종류의 계단이 영화에 들어있다.
수많은 계단 중 가장 긴 계단이 자하문 터널 앞 계단이다. 수직적인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영화 속에서 세찬 빗소리와 공포스러운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고 기택네 가족은 하염없이 내려간다. 긴장과 절망이 휘몰아친다. 앞서 말한 독일 기자가 꼽은 가장 인상 깊은 장면도 이것이었다. 기생충 포스터가 들어있는 포토존 앞에 서니, 영화가 오버랩 됐다.
기택 가족은 계단에서 내려와 자하문 터널을 달린다. 기우는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터널을 빠져나간다. 영화 속 기택처럼 매캐한 공기의 자하문 터널을 걸었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 줄 아니? 무계획이야. No plan.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라고 하는 기택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자하문 터널을 거쳐 서촌 한 바퀴

자하문 터널을 통과하니 초록빛 찬란한 나무가 반긴다. 영화의 울렁임은 잠시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다. 경복궁과 부암동, 서촌과 북촌, 귀하고 아름다운 곳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중에서 선택한 곳은 서촌이다. 경복궁 서쪽 마을이라 ‘서촌’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21세기까지 다채로운 모습을 품고 있다.
세종대왕이 태어난 ‘세종마을’, 떡볶이로 유명한 ‘통인시장’, 한국화 1세대 박노수 화백의 ‘박노수 미술관’ 등 둘러볼 곳이 넘친다. 이중에서 한 곳을 꼽자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헌 책방인 ‘대오서점’이다. 1951년 조대식 할아버지와 권오남 할머니가 이름 한 글자씩 따서 이름 지은 서점으로, 손자가 할머니 할아버지 숨결을 지키며 옛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지금은 책은 팔지 않고 북카페로 운영한다.

자하문 터널 앞 계단과 터널 입구. 기택네 가족은 긴 계단을 따라 내려가 터널 속 좁은 길을 달렸다.
자하문 터널 앞 포토존
상암동에 가면, 기택의 옷을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장소만큼이나 의상도 중요하다. 기택 가족과 박 사장 가족의 이미지는 옷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상암동 한국영화박물관에 가면, 실제 영화 속에서 배우가 입은 의상을 볼 수 있다. 8월에는 기택의 니트와 바지, 기우의 셔츠와 바지, 문광의 원피스와 코트, 스카프가 전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