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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계획 이야기⑧
두 유 노 강남스타일?
– 강남 개발 (2)- 글. 최성원(서울지역본부 차장)
- 지난 호에서 강남 개발의 역사적 배경과 계획적 특징에 대해 살펴봤다면 이번 호에서는 강남 개발을 촉진시킨 여러 물리적·제도적 내용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서울 3핵 도시 구상
1974년, 육영수 피격사건을 계기로 양택식 서울시장이 물러난 자리를 구자춘이 물려받았다. 그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의 핵심 인물이다. 구자춘은 세운상가 설계를 시작으로 당시 정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건축가 김수근 팀으로부터 “현재 서울 도시계획에는 철학이 없다. 지금은 단핵 도시이지만 향후 발전을 감안하면 다핵 도시여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특히나 지프차로 이동하던 그로써는 점점 심해지는 서울의 도로 정체 문제가 도시계획을 뜯어 고쳐야 해결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종로 일원의 기존 도심에 하나, 여의도와 영등포 일원에 하나, 그리고 영동 및 잠실 일원을 하나로 하여 3핵 도시 개념을 만들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간 서울 구도심에 입지한 시청 및 각종 관공서·버스터미널·학교 등의 이전, 지하철 순환선(현재의 2호선) 건설 등의 엄청난 계획들을 발표하게 된다.

- <2030 서울도시기본계획(2011)>, 구자춘이 개념을 정립한 이후 3핵 도시 구조의 도시계획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지하철 2호선, 방사선 VS 순환선
도시 공간을 확장하는 일반적인 패턴은 중심에서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방사선의 도로망을 조성한 다음, 이를 연결하는 순환선을 조성하는 것이다. 초기 구상 당시 2호선은 왕십리에서 영등포까지의 제한적 노선이었으나 3핵 도시를 반드시 조성하고자 했던 구자춘은 포병 출신의 경험을 토대로 직접 노선을 그렸다. 지금의 강남 일대, 특히 당시 서울시의 역점 사업이었던 잠실 시영아파트를 거쳐가도록 지금의 순환선 형태로 지하철 2호선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1978년에 착공해 1984년에 준공된 지하철 2호선으로 인해 강남·북 인구비율이 획기적으로 변했음은 당연지사였다.
고속버스터미널과 잠수교·반포대교
강남 개발 촉진을 위한 강북 억제책 중 하나가 지방에서 서울 구도심으로 집중되던 각종 고속버스 및 시외버스 터미널의 강남 이전이었다. 이에 당시 미개발지였던 반포 지역에 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주변 지역을 ‘아파트 지구’로 지정해 주거 밀도를 상향시켜 강남 개발의 속도를 높이는 한편, 터미널 입지에 따른 강남·북 연결성 강화를 위해 지금의 반포대교 하부인 잠수교를 먼저 건설하고 교통량 증가에 대응해 상부에 반포대교를 건설했다.

- 잠수교 전경. 잠수교는 ‘안보교’라고도 불렸는데 전쟁 등 유사시에 파괴되더라도 짧은 경간으로 인해 신속한 복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파트 지구의 탄생
반포를 포함한 강남 개발 사례에서 눈여겨 볼 점은 국내 최초로 도입된 ‘아파트 지구’이다. 초기 강남의 개발이 더뎠던 이유는 토지구획정리방식으로 추진된 강남 개발의 특성상 군소 지주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지구에 편입된 토지의 경우 자금력 내지 아파트 건설 관련 면허가 없는 토지주가 홀로 아파트를 지을 수는 없으므로, 자신의 땅을 아파트 건설사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 건설사들은 ‘선분양’ 제도를 활용해 입주자를 사전에 모집하고 이들에게서 받은 계약서를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비교적 저리에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행했다. 또 입주자들로부터 받은 자금을 인근 토지 매수 및 아파트 건설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었으니 강남 개발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여러 건설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강북 명문 학교의 강남 이전과 8학군 형성
건축가 김수근 팀이 구자춘 시장에 보고한 서울 3핵 도시 관련 내용 중에는 ‘강북 내 각급 학교의 강남 이전’도 있었다. 이는 대중교통 혼잡의 주요 원인이 강북에 집중된 고등학교 탓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72년 유신헌법 선포, 1973년 고교평준화 제도 시행 이후 소위 명문고의 강남 이전을 위해 강남 내 학교 용지를 명문고 소유자들에게 헐값에 매각하는 방식을 택했다. 강남에 새로이 지어진 학교 건물 및 교원의 수준이 높았으므로 강남 이전 명문고의 명성과 인기는 이전 후에도 꾸준히 유지되었다. 특히 1979년부터 시행된 고교 학군제를 계기로 강남 등지가 포함된 8학군에서 강남 내 명문고를 진학하기 위해선 반드시 강남에 거주했어야 하므로 주거지로서의 강남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 강남 개발 당시 ‘아파트 지구’ 위치도. 주로 한강변과 경부고속도로 및 고속버스터미널 부근으로, 강남 전체의 약 25% 면적이다.

- LH의 전신 주택공사에서 건설한 반포주공아파트 전경. 당시 중산층을 겨냥한 중형 아파트 단지로, 최근 진행 중인 재건축이 끝나면 또 다시 최고급 거주지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근현대 대한민국의 상징, 강남의 특징
1976~1990년의 사이 서울 전체 가구 수 증가는 2배, 인구 수 증가는 약 1.5배임에 반해 강남구 및 서초구의 경우 가구 수 9.4배, 인구 수 7.6배로 폭증하였다. 그 배경에는 1974년 공산화 도미노 현상에 의한 남침에 대한 우려에 기인한 부분도 있다. 뿐만 아니라 산업화에 의한 핵가족화, 그리고 연료 혁명에 의한 난방 방식의 변화와 그에 힘입은 주거 양식의 획기적 전환(단독 주택 → 아파트)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강남으로 이주한 가구의 특성은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 고학력자, 나이는 30~50대가 대부분이었다. 보다 좋은 곳에서 살기 원하는 인간의 특성상 전후 열악했던 저층 단독 주택 지역 대비 현대적 주거 양식을 사용해 편의성이 보장된 아파트를 국민들이 점점 더 선호하게 된 것은 우연과 필연의 절묘한 조화였다. 시대적 여건과 정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대한민국 서울의 상징 중 하나로 자리잡은 강남의 진화는 현재 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계속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도시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상된다.
- 참고문헌
- • 서울도시계획이야기 3권, 손정목 (2003)
- • 이미지 출처 : 서울시 및 서울역사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