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노트

세계 일주,
왜 낡은 마을버스와
떠났는가

글. 사진. 임택 여행작가, <마을버스로 세계여행> 저자

나의 꿈을 찾아서

내 나이 55세가 되던 해, 나는 낡은 마을버스와 함께 세계 일주를 떠났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계획에 많은 사람이 걱정했다. 이미 48만 km를 운행했고 폐차를 6개월 앞둔 낡은 차였기 때문이다. 차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 또한 거친 여행을 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행동은 나의 어린 시절과 이어져 있는 것 같다. 내 고향은 김포공항의 활주로가 끝나는 작은 농촌 마을이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 소일거리가 없는 마을 사람들은 해가 지면 뒷동산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육중한 비행기가 뜰 때면 저마다 아는 체를 했다.
“저 비행기는 홍콩에 가는 거야.”
“아니야 동경에 가는 거라고.”
“동경? 방콕이랍니다.”
가끔 거친 말싸움도 벌어지곤 했다.
나는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내 마음에 큰 꿈이 심어졌다.
‘나는 이다음에 저 비행기를 타고 멋진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이 될 거야.’
소년의 꿈은 5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었다.
대학교 졸업 후 나는 짧은 직장 생활을 하다 작은 무역회사를 차렸다. 아마도 비행기를 타고자 하는 마음에서 무역업에 매력을 느낀 듯했다. 사업이란 부침이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여행작가에 대한 꿈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40대 중반에 나는 인생 역전에 가까운 기회를 잡았다. 파키스탄을 여행하다 우연히 발견한 아이템이었다. 나는 파키스탄으로부터 암염으로 만든 소금 등을 수입했다. 암염을 둥글게 다듬은 후 가운데 구멍을 뚫는다. 그 안으로 작은 전구를 넣고 불을 밝히면 아름다운 전등이 된다. 게다가 이 등은 천식에도 좋다는 소문이 있어 사람들에게 날개 돋친듯 팔려나갔다. 마진도 매우 좋았던 것이 화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경쟁자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가격이 폭락하자 재고가 많았던 내게 타격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과감히 사업을 정리하고 오랜 꿈에 도전했다. 여행작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내 나이 52세였다. 나의 이런 결정에 주위 사람들은 걱정이 컸다. 나를 아끼는 마음이 클수록 더 거세게 나를 돌아세우려 했다. 그 이유는 여행작가를 하기에 내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동안 여행작가로 살아왔던 사람들도 이 나이가 되면 그만두려 한다는 것이다. 힘들고 돈벌이도 안된다는 이유였다. 매우 다행이었던 것은 가족들의 지지였다. 항상 여행작가의 꿈을 숨기지 않았던 내게 아내는 큰 성원을 보냈다. 다 자란 두 아이도 아버지의 선택에 박수를 보냈다. 딸은 자신이 다니는 회사 잡지에 ‘우리 아빠는 포기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농부와 같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신문 기사를 내게 보여줬다. 모 여행작가학교의 학생 모집 광고였다. 그후 여행학교를 졸업했으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이것은 마치 멀리서 보는 높은 산의 모습과 닮았다. 아무리 높은 산도 멀리서 보면 능선과 봉우리가 전부다. 단순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산은 매우 복잡한 모습으로 변한다. 여행작가도 다르지 않았다. 여행작가라는 프로의 세계로 접근하면서 수많은 난관과 마주쳐야 했다. 이미 여행작가의 세계는 기성 작가들에게도 쉽지 않은 정글이었다.
나는 방황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왔나 봐.’
나는 그만 길을 잃었다.

마을버스, 너의 이름은 ‘은수’

어느 여름날, 나는 언덕 위에 앉아 가파른 길을 올라오는 마을버스를 바라보게 되었다. 마을버스는 몇 번을 섰다 오르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마을버스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곤 했다. 보기에도 힘겨워 보였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마을버스에게 꿈이란 게 있을까? 주어진 길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보내야 하는 인생, 정해진 곳 외에는 마음대로 설 수도 없는 인생, 저러다가 10년이 되면 폐차를 하거나 다른 나라로 팔려나가는 인생.’ 그의 인생이 나와 닮았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마을버스가 내 옆에 왔을 때 그에게 물었다.
“야, 마을버스 너, 꿈, 있냐? 죽을 때 아니 폐차되기 전에 하고 싶은 것.”
잠시 머뭇거리던 마을버스가 대답했다.
‘응, 하나 있어. 고속도로 한번 달려보고 죽는 거지.’
내가 그에게 말했다.
“야, 마을버스. 나와 함께 전 세계의 모든 고속도로를 달려 보자고.”
이 독백을 통해 내가 왜 여행작가로 한 발짝을 나가지 못했는지그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내가 독자에게 전할 콘텐츠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때 여행하며 겪은 이야기를 나의 인생과 버무려 용기를 전하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 ‘인생을 이야기하는 여행작가’라니 얼마나 멋진가!

은수와 함께 세계 일주를

그로부터 3년 후, 나는 ‘은수’라고 이름 지은 낡은 마을버스와 함께 세계 일주 길에 올랐다.
그런데 은수에게는 몇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는 시속 60km 이상으로 달려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시내에서는 시속 60km 이상은 속도위반이다. 혹여라도 과속으로 인한 벌금이라도 물을까 염려해 주인은 은수에게 ‘속도제한장치’를 달아 버렸다.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둘 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집과 직장을 오가며 살아온 나와 주어진 노선만달려온 마을버스나 다를 것이 없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여정이란 매일 새로운 환경과 맞서는 일이 아니던가?속도제한장치를 풀었으나 은수는 시속 70km 아니 60km도 힘들어했다. 그래도 우리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은수는 새로운 한계를 넘을 때마다 요동쳤다. 더 높은 한계에 도전할수록 고통은 더욱 거셌다. 은수는 어느덧 시속 90km 이상으로도 달리게 됐다.
여행을 떠난 지 4개월이 될 무렵, 우리는 칠레의 ‘판 아메리카나 하이웨이, Pan Americana Highway’를 달리게 되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대형 버스가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 저 차 한번 추월해 볼까?”
나는 점점 속도를 높였다. 잠시 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시속 120km로 앞서가던 대형 버스를 추월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그에게 추월당하지 않았다. 평생을 시속 60km 이하의 속도로 살아온 은수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여행이 끝나도 도전은 계속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은수의 운행 기록은 무려 70만 km가 넘었다. 올해로 그가 태어난 지 19년이 흘렀다. 국내 버스 중가장 나이가 많은 차가 분명하지만 지금도 고속도로를 질주한다.나와 은수는 677일간 48개국을 거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 중에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들은 이웃이 되어 우리를 도와줬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푸른 버스를 함께 탔다. 그들은 지금도 이 푸른 버스와 눈 작은 한국인을 추억으로 기억할 것이다.
만일 은수가 나와 함께 세계로 떠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6개월 후 폐차장에 누워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성공한 인생이야. 나는 주인의 뜻을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어. 최선을 다해 근면하게 살아왔잖아.’
은수는 계기판에 기록된 대로 <시속 170km>까지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 말이다. 나 또한 여행작가로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까지 많은 강연과 방송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여행을 마친 후 한 신문기자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 지금 어떻게 변화되었나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청년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내가 도전을 멈추지 않는 한 저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나는 지금도 내게 펼쳐질 미래에 더 많은 관심과 기대에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