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노트

하루가
제자리걸음인 것 같을 때
내가 하는 단 한가지

글. 사진. 안정은 러닝전도사

모리셔스, 스위스, 영국, 발리, 미국, 코타키나발루 등 달리기로 전 세계를 누비고 있는 안정은 러닝전도사. 원래 그의 삶은 달리기와 거리가 멀었다. 악기는 ‘도레미파솔라시도’까지만 배우고, 창고에 묵혀두기 일쑤였고, 학기 초 새로 산 노트는 늘 첫 3장까지 알록달록 필기가 되어 있을 뿐 뒷장은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금방 싫증 내는 그가 지금은 인생이라 비교하는 ‘마라톤’이라는 것을 한다. 42.195km를 쉬지 않고 4시간 동안 달려내고, 100마일(160km)의 서울 둘레길을 38시간 동안 달렸으며, 250km의 몽골 고비사막 마라톤까지 완주해 냈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더니

그날따라 봄 소리가 내 방까지 들어왔다. 창문을 꼭 걸어 잠그고, 암막 커튼을 어둡게 쳤음에도 봄이 왔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에 이끌려 1년 만에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처음 나갔다.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맑은 공기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동시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0대 중반, 매일 집에서 울며 그 누구와 연락도 단절한 채 은둔형 생활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성적에 맞춰 컴퓨터공학과를 전공해 개발자가 되었지만, 원하는 일이 아니었고, 결국 6개월 만에 퇴사자가 되었다. 그 후, 어릴 적 품어왔던 꿈인 승무원에 도전했다. 1년간 독한 준비 끝에 가고 싶었던 중국 항공사에 당당히 합격했다. 드디어 인생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게 된 순간이었다. 공증, 번역을 거쳐 필요한 각종 서류를 빠짐없이 준비한 뒤, 중국 본사로 넘어가 신체검사를 받았다. 계약서도 작성했고 이제 가슴에 윙 배지를 달 일만 남았다.
한국에 돌아온 며칠 후, ‘사드 배치’라는 것이 뉴스에 도배되기 시작하였다. 그렇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일은 점점 커져만 갔다. 중국에 있던 한인 마트와 식당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요우커(遊客)의 발걸음은 뚝 끊겼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는 취업 비자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중국행을 기다리는 합격생은 200명. 하지만 오직 일주일에 한두 명만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1년의 기다림에도 결국 끝내 마지막으로 나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왜? 도대체 왜? 끝없는 질문에 사로잡혔다. 친구들은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너 합격한 거 거짓말이지?”, 어른들은 나를 질타하기 시작했다. “사기당한 거 아니냐?”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둔 캐리어는 1년 동안 방문 앞을 지키다가 결국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창고로 들어가게 되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
누군가가 정해준 삶이 아닌,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게 별거 아닌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1년 만에 나간 바깥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라 잃은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것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왈칵 쏟아져 나왔다. 정신 차려보니 아파트 주민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달렸다. 1년 만에 밖으로 나온 내가 달려봐야 얼마나 달릴 수 있겠는가. 5분 달렸을까.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고, 목은 따끔거렸으며, 심장은 마구 요동쳤다. 이러다가 죽을 것만 같아 달리기를 멈춰 숨을 골랐다. 헉헉. 머리가 잠시 핑- 했지만 금방 깨끗하게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우울감, 패배감, 자기 연민까지도 온 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처음으로 ‘상쾌’라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숙면했다. 다음날, 일과 없는 나는 또다시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 어제 있었던 일을 되풀이했다. 5분 달리기. 여전히 심장은 요동쳤지만, 동시에 평온해지는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그 다음날은 6분, 7분, 8분… 1분씩 시간을 늘려 달리기 체력이 늘더니 방 안에 갇혀 우는 시간은 1분씩 단축되었다.

하루 5분만 달려도 된다고?

드디어 나에게도 하루 일과가 생겼다. 바로, 어제보다 1분 더 달리기. 이 별거 아닌 5분이 하루 전체를 바꿔 놓기 시작했다. 할 일 없이 시간만 잡아먹는 나는 인생에서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매일 내가 정해 놓은 결승선에서 맛보는 성취감이 곧 나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샤워도 해야 했고, 내일의 날씨도 확인해야 했고, 아르바이트해서 새로운 운동화를 장만해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일상들이 나에게는 큰 변화였다.
성취감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건 성취감의 빈도였다. 원하는 꿈에 합격했다는 성취감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지만, 결국 오래 기억되지 못했다. 하지만 어제 경험한 성취감은 오늘도 반복하게 해주었고,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아무 소득 없는 날에도 괜찮았다. 이미 오늘 끝까지 달려봤으니까. 점점 더 많은 친구가 좋은 회사에 합격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와도 신기하리만큼 괜찮았다. 내일은 왠지 나에게도 기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 어떠한 위로와 시간도 동굴 같은 방 안에서 나를 꺼내지 못했지만, 그저 평범한 하루 5분 달리기가 다시 사람들 앞에 서는 용기를 주었다. 처음으로 끝맛을 보게 해준 것이 나에겐 달리기였다.

이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이 펼쳐진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 달리고 달리다 보니 42.195km라는 ‘마라톤’의 출발선까지 서게 되었다. 3, 2, 1. 출발 신호가 울리고 많은 사람 틈에서 나도 달리기 시작했다. 21km 즈음 지났을까. 한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이 펼쳐진다.’ 저게 과연 무슨 말이지? 끝이면 끝이지 뭐가 또 있다는 거지? 되묻고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결승선에 다다랐고 단번에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승무원의 길을 포기하지 못한 내게 홀가분하게 꿈을 포기하게 된 시점이었다. 끝인 줄 알았던 그곳에서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목표가 생겨난 것이다.
첫째, 이렇게 먼 거리를 달려온 나인데 더 이상 못 할 일은 뭐가 있을까. 둘째,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분명 두 번째로 하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다. 셋째, 더 이상 숨지 않고 끊임없이 나의 과거를 마주하고 되묻던 것이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위로가 되었다. 결승선에서 두 팔 벌려 마중 나온 나는 이미 그 모든 정답을 알고 있었다. 두 발로 끝을 확인해 보니 ‘성취감’이라 불리는 감정들이 끝이라서 멈추는 것이 아닌 끝이라서 계속 나를 달리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인생은 정말 마라톤일까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었다. 같은 속도로, 같은 목표를 향해, 같은 길을 달릴 필요는 없었다. 인생의 결승선은 단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가 아니기에 목을 맬 이유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나만의 결승선을 만들어 내면서 그것들을 연속으로 이어 나가는 것이 진짜 나만의 인생 마라톤 길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 누군가가 정해준 삶이 아닌,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 요즘도 이따금씩 허망한 느낌이 들거나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면 새벽이건 밤이건 달리기를 한다. 5분이든, 10분이든 내가 정한 목표까지만 달린다. 그곳에서 성취감으로 무장된 또 다른 내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여기서 잠시 숨 돌리고 내일 다시 걷기부터 시작해보자고 꼭 안아주며 다시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나는 이제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