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어때?

환한 봄볕 아래,
함양

글. 사진. 이시목(여행작가)

천년 된 숲길을 밟는 기분은 오묘하고 묵직하다. 이 숲에 위안들이 깃들어 봄내 연둣빛으로 출렁댄다. 수백 년의 세월을 숨 쉰 마루에 앉아 봄볕을 쬐는 잠시도, 너른 암반에 앉아 봄바람을 쐬는 한때도 참 좋았다. 큰 산 아래 절집을 기웃대며 만나는 봄빛엔 마음이 설렜고, 지리산과 덕유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앞에선 가슴마저 살짝 뛰었다. 경상남도 함양군의 봄날은 그토록 깊고 환했다.

조붓한 숲길에 마음을 놓다

오래된 나무가 풍기는 냄새는 편안하다. 천년의 숨결이 깃들었다면 더할 테다. 함양 읍내에 있는 상림은 ‘천년 시간’이 부린 봄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자연림처럼 보이지만 통일신라시대 때, 당시 함양의 태수였던 최치원이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든 인공림이다.
계절적으로 상림은 단풍이 찬란한 11월에 여행하기 가장 좋다. 하지만 봄날의 연둣빛 숲도 꽤나 화사해 ‘강추’할 만하다. 일교차가 큰 봄날이면 상림 곁을 흐르는 위천과 숲 사이를 흐르는 개천에서 뽀얀 물안개가 돋아 한층 신비로워진다. 숲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0분가량이다. 산책코스는 함화루에서 사운정을 돌아 물레방아까지다. 조선시대 때 지어진 함화루는 원래 함양읍성의남문으로 쓰였던 누각이다. 누각 자체의 고풍스러움에 신록의 싱그러움까지 더해져 산뜻하다. 함화루를 벗어나면 길은 곧장 숲으로 이어진다. S자로 멋스럽게 굽이진 길을 지나 신작로 같은 숲길을 거쳐 물레방아에 닿는데, 주위 사방이 연둣빛이다. 아직 숲이 하늘을 덮지 않아 나뭇잎 그림자가 길마다 내리고, 머리 위에서는 햇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그 숲길 벤치 어디쯤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아 봐도 좋겠다. 봄바람에 나뭇잎 살랑대는 소리가 봄밤, 비 내리는 소리 같을 테다.
걷다 보면 상림에선 문화유적도 여럿 만난다. 함화루, 사운정,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이은리 석불 등이다. 이 중 눈길을 끄는 것이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다. 상림을 조성한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23년에 후손들이 세운 기념비라는데, 비석을 받들고 있는 거북조형물의 표정이 참 순박해 보인다. 상림 안에는 또 최치원, 정여창, 김종직, 박지원 등 ‘함양을 빛낸 역사인물’ 11인의 흉상을 모아 놓은 역사인물공원도 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봄빛 무르익어 여름빛이 시나브로 스며드는 5월 중·하순이면, 숲 주위를 붉은 양귀비꽃이 빼곡하게 채우니, 이 또한 놓치지 말자.

  • 상림공원

  • 아직 숲이 하늘을 덮지 않아
    나뭇잎 그림자가 길마다
    내리고, 머리 위에서는 햇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그 숲길 벤치
    어디쯤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아
    봐도 좋겠다. 봄바람에 나뭇잎
    살랑대는 소리가 봄밤, 비
    내리는 소리 같을 테다.
잘 늙어 고운 집들을 만나다

잘 늙은 집은 ‘오래된 건물’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함양엔 선비문화로 상징되는 고택과 서원, 정자가 많다. 고택은 개평마을에 밀집돼 있고, 정자는 화림동계곡에 즐비하다. 남계고택과 청계서원 등 함양을 대표하는 두 서원은 수동면 원평리에 이웃해 있다.
먼저 찾을 곳은 화림동계곡이다. 서울에서 남하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화림동계곡은 본래 ‘팔담팔정’으로 이름을 날렸던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 8개의 정자가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는 ‘호남의 정자는 자연과 흔연히 일치하는 조화로움과 아늑함을 보여주는데, 영남의 정자는 자연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화림동계곡을 따라 펼쳐진 선비문화탐방로(1코스)를 걸으며 만나는 정자들은 자연을 압도한다.
첫 탐방지는 거연정이다. 거연정은 총 6.2㎞(1코스) 길이로 조성된 선비문화탐방로의 시점으로, 들쭉날쭉한 바위에 주초석으로 높낮이를 맞춰 세웠다. 깊은 담 곁에 날렵하게 올라앉아 그 풍치가 호기롭다. 거연정에서 군자정과 영귀정을 지나 만나는 동호정도 멋스럽다. 차일암(너럭바위)을 마당으로 둔 동호정은 그저 쓱 깎아 걸친 듯 결이 거친 나무계단과 천장이 인상 깊다. 동호정에서 계곡을 따라 1시간여를 더 걸어야 닿는 농월정은 선비문화탐방로의 화룡점정이다. ‘밝은 달밤에 한 잔 술로 계곡 위에 비친 달을 희롱한다’라는 이름처럼 절경을 자랑하던 정자였는데, 화재로 소실됐다 몇 해 전에 복원됐다. 맑고 풍성한 계류를 끼고 펼쳐진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쉬는 재미가 좋다.

  • 군자정

  • 거연정

개평마을과 남계서원은 조선시대 학자인 정여창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다. 정여창이 태어나 자란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는 100년이 넘는 고택 60여 채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누군가 ‘오래된 집엔 그 집을 살다간 사람들의 역사와 정신, 이야기가 담겨 있다’라고 했다. 정여창 선생의 집인 일두고택을 찾으면 그가 강조했던 충과 효의 정신을 만날 수 있다. 솟을대문에 걸려 있는 충·효 정려편액 5점에 깃든 이야기가 특히 많다. 건물 자체도 눈에 띈다.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 보면 수령 300년 된 소나무가 용틀임을 하며 뻗어나간 자태가 눈부시다. 나이 먹은 담장을 따라 마을을 휘돌면 오래된 집들이 전하는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현재 대부분 고택에서 한옥스테이를 운영해 개평마을에서 하룻밤 아늑하게 묵어가는 것도 좋다.
개평마을에서 남계서원은 4㎞ 거리다. 정여창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소수서원(경상북도 영주시)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사액서원이다. 구조가 단순하고 꾸밈이 소박하지만 함양 선비 문화의 기둥뿌리다. 풍영루 2층 누마루에 앉아 서원 일대를 바라보면, 문득 그들이 배우고 가르치고 토론하던 것들이 궁금해진다. 그 내용 중 하나였을 것들이 풍영루에 단청으로 표현돼 있다.

개평마을

큰 산 아래 절집에 깃든 봄빛

함양은 지리산으로 드는 길목이기도 하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다. 그 너르고 큰 그늘에 사람이 모여 앉아 사는 곳이 마천면이다. 함양 읍내에서 마천면은 지안재를 넘어야 한다. 지안재는 예부터 삼남지방의 보부상들이 장터목으로 가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지고 울며 넘던 고개다. 길이 뱀처럼 굴곡져 보기에도 아찔한데, 고개 정상 즈음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서면 그 아득했을 시간들이 굽이져 보인다. 가까스로 지안재를 넘고 나면 칠선계곡 입구에서 벽송사 가는 길을 만난다. 벽송사의 명물은 단연 서암이다. 1989년 만들어진 석굴법당인 서암은 바위에 조각된 부처들로 유명하다. 특히 경주 석굴암을 연상케 하는 석굴법당 안에 조각된 불상조각이 섬세하고 이채로워 놀랍다.
서암이 지리산 일대에서 가장 이색적인 절집이라면, 금대암은 전망 좋은 절집이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금대산 바로 아래 벼랑에 있는 암자로, 일명 ‘지리산 조망대’로 불린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위시한 중봉, 하봉, 제석봉 등 지리능선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져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내려오는 길에 만나는 도마마을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금대암의 숨은 1인치다. 도마마을은 일명 ‘지리산 다락논’ 풍경으로 스타덤에 오른 곳이다. 천년 넘게 농사를 지어온 억척이 눈물겹다.

서암정사

함양 핫플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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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왕봉에서 천왕봉을 보는 일
      대봉산휴양밸리

      요즘 함양에서 가장 핫한 곳이다. 국내 최장 길이인 모노레일(3.93㎞)과 짚라인(3.27㎞)을 갖췄다. 산악자전거 체험 코스와 숙박시설 등 자연 속에서 힐링할 수 있는 휴양시설도 다양하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은 대봉산 정상을 순환 코스(70여 분 소요)로 오가는 모노레일이다. 대봉산 정상인 천왕봉의 해발고도는 1,228m. 모노레일로 오르는 국내 산 중에서 가장 높다. 덕분에 정상에서 만나는 조망이 탁월하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장터목, 세석평전, 벽소령,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지리능선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감탄을 자아낸다.

    • 유럽풍의 산머루 테마농원
      하미앙와인밸리

      하미앙. 외국어 같지만 지역명인 ‘함양’을 부드럽게 풀어 지은 브랜드다. 지리산 일대 해발 500m 고지에서 친환경으로 재배한 산머루를 테마로 한 와인농원으로, 유럽풍으로 지어져 데이트 코스로 인기 있다. 특히 차와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 인근 초지와 와인숙성고인 와인동굴 등이 SNS에 자주 업로드된다. 경상남도의 아름다운 민간정원으로, 와인 족욕과 산머루비누 만들기 등 체험도 가능하다.

    • 지리산둘레길의 핫플레이스
      마을카페 ‘안녕’

      지리산둘레길 중 인월~금계 구간이 지나는 창원마을에 있다. 지리산둘레길이 지난다고 해도 막상 찾아가 보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올까’ 싶도록 외진 곳에 자리했다. 온갖 꽃과 나무들이 카페를 폭 감싸 안아 동화 같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산골카페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에 위로를 주기도 한다고. 곶감이 들어간 옛날 빙수와 마을 주변에서 나는 식재료로 만든 수제케이크가 인기다.

함양에 꽃을 피운 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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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양 서하초 매입임대주택과 ‘서하다움’
      함양 주거플랫폼 사업

      거연정과 동호정을 품은 서하면은 함양군에서 인구와 면적이 가장 작은 지역 중 하나다. 본래 작았던 곳이 인구 감소로 생기마저 잃어, 소멸 위기 지역으로 자주 언급되곤 했다. 그랬던 서하면이 요즘 확 달라져 화제다. 인구가 대폭 늘어난 것은 물론 전국구 ‘핫플’로도 급부상했다. 이른바 ‘지방 소멸 극복의 대안’으로 서하면의 서하초등학교와 함양 서하다움이 주목받으면서부터다. 학교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시작한 ‘작은 학교 살리기’ 프로젝트가 주거·일자리·생활SOC(국민 생활편익 증진시설)가 결합된 주거 플랫폼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서하면으로 전입한 인구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특히 LH가 여러 기관과의 협업으로 조성한 서하다움은 농촌 면 단위에서 조성한 전국 최초의 임대주택으로 주목받는다. 이곳에 함께 조성한 ‘서하다움 청년레지던스(카페, 커뮤니티 공간 등을 갖춘 플랫폼)’도 일자리와 생활여건이 개선되는 효과로 이어져 전국 지자체의 관심을 듬뿍 받는 사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