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노트
미술사는
파괴를 통한 창조,
곧 혁신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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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는 그 다양한 양식과 사조의 전개가 시사하듯 무수한 혁신의 역사를 펼쳐왔다. 이는 미술이 창조적인 활동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사실 파괴가 없는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미술의 역사는 한마디로 끝없는 파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제아무리 강력하고 압도적인 양식이 등장해도 곧 거대한 파괴의 물결이 일어나 새로운 조형으로 미술의 판이 바뀌었다. 그렇게 고전주의에 맞서 낭만주의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맞서 사실주의가, 사실주의에 맞서 인상파가 연이어 등장했다. 그 지속적인 파괴와 극복의 역사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게 바로 혁신의 역사다.
글. 이주헌 미술평론가, <혁신의 미술관> 저자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버스에 유채, 48x63cm,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혁신으로 미술의 판도를 바꾸다
널리 알려져 있듯 고전주의 미술은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다. 정연한 질서와 규칙 속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 미술이 고전주의 미술이다. 그래서 고전주의 회화를 보면 비례가 잘 맞고 구성에 짜임새가 있어 모든 게 조화롭다는 느낌을 준다. 한마디로 대상을 이상화해 표현하려 한 미술이다. 하지만 낭만주의 미술은 고전주의 미술의 이런 미의식에 도전했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가 지나치게 규범을 강조해 화가의 주관이나 감정을 억압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식적인 질서와 조화보다는 미술가 개인의 개성이나 느낌을 더 중시했다. 꿈이나 상상처럼 화가의 내면을 반영하는 소재나 이국적인 대상, 격정적인 소재를 즐겨 다뤄 고전주의의 안정성을 해체해 버리고 주정적인 표현을 부각시켰다.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의 이런 주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은 미술 사조다.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감정에 치우쳐 그리는 것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사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했다. 대상의 형태만 사실적으로 묘사한 게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당연히 사실주의자들 가운데서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거나 혁명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이 나왔다.
인상파 미술은 애초부터 사실주의의 전통을 거부하려 한 미술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에 대한 인상파의 특별한 관심이 결국 사실주의 전통을 파괴해버리고 말았다. 인상파가 빛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는 이유가 사물에 반사된 빛이 우리의 시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과학적인 표상의 원리에 입각해 현상을 묘사하려면 사물 자체보다 빛을 묘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빛의 효과를 실감나게 표현하려고 애쓰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럴수록 사물의 객관적인 형태가 깨지고 그림이 거칠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화가들에게는 그 파괴가 매우 신선하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러자 인상파는 빛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는 쪽으로 조형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렸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은 아예 관심을 접어버렸다.
혁신가에게 한계는 축복이다
이렇듯 미술사의 전개는 이전 양식이나 사조를 이후의 양식이나 사조가 파괴하고 극복하는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이를 이끈 미술사의 위대한 천재들은 기존의 이념과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과 이야기를 펼쳐온 이들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기성체제의 강고한 벽에 부딪혀 고생하면서도 그토록 굳건히 자신의 길을 고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남다른 혁신의 의지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 의지로 그들은 현실의 모든 제약을 파괴하고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미술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을 얻는 한편으로, 혁신의 다양한 사례와 원리에 대해 광범위하게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귀가 먹어도 계속 작곡을 한 베토벤이나 그림이 안 팔려도 줄기차게 그림을 그린 반 고흐가 시사하듯 혁신의 본질과 관련해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혁신가에게 ‘한계는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혁신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빚어낸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혁신가들에게 한계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한계가 없었다면 그로 인한 혁신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베토벤의 한계가 악성(樂聖)을 탄생시켰고, 반 고흐의 한계가 화성(聖)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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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자. 저 먼 선사시대의 인류는 오늘날의 인류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한계 속에서 살았다. 그런 까닭에 인류는 문명을 일구던 초기부터 혁신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인류는 곤경에 처하고 한계에 부딪칠수록 혁신에 혁신을 거듭해왔다. 미술 또한 저 고대부터 지속적인 재료적, 기술적, 방법적 혁신을 통해 부단히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해왔다. 석기시대를 거치면서 석조(石彫)를 발달시켰고,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브론즈 조각을 발달시켰다. 숯을 만드는 기술이 그을음을 이용하며 먹을 만드는 기술로 나아갔고, 튼튼한 돛을 만드는 기술은 유화를 위한 캔버스를 낳게 했다. 종이의 발명은 수성 회화 및 판화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의 발달은 미술 분야에서 그와 연관된 혁신을 낳았으며, 이런 기술적 진보와 각 시대의 시대정신, 시대감성, 시대경험이 맞물리면서 다채로운 양식과 조형언어가 파생되었다.
조형예술인 미술에 있어 가장 큰 한계는 아마도 시각적 한계일 것이다. 미술가들은 일찍부터 시각의 한계를 잘 이해했고 이를 영리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착시현상이나 잔상 같은 시각현상은 인간의 시각이 매우 한계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줌과 동시에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매우 의미 있고 환상적인 시각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로 인해 미술가들은 시각적 한계가 오히려 기회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고, 이런 깨우침은 많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다양한 시각적 실험을 하도록 이끌었다.
조선시대 화가 김명국의 혁신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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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파괴와 창조, 혁신이 사실은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미술사의 작은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주고 싶다. 조선시대의 화가 김명국의 이야기다.
김명국은 조선통신사 수행원으로 일본에 간 적이 있다. 그때 그의 명성을 들은 한 일본인 부자가 집에 벽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해왔다. 그 부자는 벽을 죄다 비단으로 바르고, 물감으로 금가루 즙을 준비했다.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달라고 돈을 엄청나게 들인 것이다. 먼저 술을 청해 잔뜩 마신 김명국은 금가루 즙 한 사발을 들이켜더니 벽에 확 뿜어버렸다. 말릴 틈도 없이 다량의 금가루 즙을 막무가내로 벽에 그렇게 뿌려댔다. 사방 모든 벽에 금가루 즙이 튀고 흘러 난장판이 되었다. 걸작에 대한 기대로 큰돈을 투자한 부자는 너무 놀라서 죽일 기세로 김명국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껄껄 웃던 김명국이 붓을 들더니 금물이 튀긴 자취를 좇아 내키는 대로 붓을 휘둘렀다. 그 순간 거기서 산이 보이고 나무가 보이고 사람이 보였다. 단순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기가 막히게 멋진 그림이 되었다. 재앙에 가까운 파괴인 줄 알았는데, 멋진 창조로 마무리되었다.
대담하게 파괴를 시도했기에, 거기서 기발하고 다양한 이미지의 영감을 얻고 그 영감대로 그려 탁월한 걸작을 완성한 것이다. 이것이 혁신이다. 김명국의 <달마도>를 보면, 파괴를 통해 창조의 길을 걸은 이 화가의 특성이 그림에 잘 드러나 있다. 디테일을 고려하지 않고 붓을 매우 대담하게 휘두른 것 같은데 그게 어느새 조화롭고 인상적인 달마의 얼굴로 변했다. 미술을 넘어 사회 각 분야의 위대한 창조자들 모두 근본적으로는 김명국 같은 파괴자들이었다. 그들은 파괴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냈다. 그렇게 혁신가가 되었다. -
김명국, <달마도>, 1643년경, 종이에 먹, 83x57cm, 국립중앙박물관